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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렌베이크를 보면서 서울을 생각한다[이만석 칼럼]

뉴스윈코리아 기자2016.05.17 17:02:18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외곽에 있는 몰렌베이크는 유럽 테러의 온상으로 유명해진 도시다. 파리 테러의 주범 압데슬람이 거기에 4개월 동안 숨어 있었지만 그를 신고한 사람도 없었고 찾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몰렌베이크가 단순히 테러범 한 명이 우연히 도피했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은 아니다. 실상을 살펴보면 훨씬 더 심각하다.


브뤼셀은 EU본부와 의회가 있는 유럽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다. 벨기에 국민의 종교분포는 약 65%가 기독교인(카톨릭 포함)이고 6%정도가 무슬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도인 브뤼셀에는 인구의 약 25%가 무슬림이며, 그 외곽 도시 몰렌베이크는 41%가 무슬림이라고 한다. 2015년 11월 13일 130여명의 사망자를 냈던 프랑스 파리 테러의 주범들이 몰렌베이크와 그 이웃 도시 쉐어베이크를 오가며 무기를 제조하고 테러를 모의했다고 한다.

최근에 쉐어베이크 의회의 의원인 골드스테인(38)이라는 사람의 발언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는 나치를 피해서 건너온 유대인 난민의 후손으로서, 브뤼셀 시장 및 장관실의 행정실장도 겸하고 있다. 그는 몰렌베이크와 쉐어베이크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친구들의 말을 인용해서 아래와 같은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내 친구들이 가르치고 있는 몰렌베이크와 쉐어베이크의 고등학교 학생들(17~18세)의 90%가 파리 테러와 브뤼셀 테러의 범인들을 영웅으로 부른다고 한다. 

브뤼셀이나 파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국가가 주는 모든 복지 혜택을 누리며 자라난 학생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하고 무고한 많은 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테러범들을 영웅으로 부를 수가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뉴욕타임즈 2016.4.7.) 이것은 그 지역 무슬림들과 그 자녀들은 거의 모두가 파리와 브뤼셀 테러의 범인들을 영웅으로 부른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분위기라면 무슬림으로서 그 테러범들을 영웅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학교에서는 공인된 교과서를 사용할 것이기에 학교교육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역의 이슬람 사원에서 이슬람 학자들과 무슬림 교사들이 가르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과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를 기초로 만들어진 샤리아(이슬람율법)를 지속적으로 배우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생각과 가치관이 그 가르침대로 바뀌게 된다. 

지하드(알라를 위한 전쟁) 하라는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학생들이 자라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면 자연스럽게 테러범이 되는 것이다. 직접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 무슬림들도 용감한 테러범들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면서, 자신도 그 일에 동참하지 못한것에 대해 죄의식을 갖는다는 말을 이슬람권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곤 한다. 우리가 테러범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그들은 신앙심이 돈독한 영웅들로 존경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이 차라리 꿈이었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현실이다. 유럽은 기독교정신에 기초한 똘레랑스(관용) 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따라 누구든지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마음껏 가르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더니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이슬람사원에서는 어떤 교육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우리나라에서도 유럽 모스크에서와 같은 교육이 진행된다면 우리의 차세대 무슬림들도 유럽의 무슬림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이슬람의 중심지는 서울 용산의 이태원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이슬람중앙사원이다. 그곳을 방문해 보면 외적인 분위기는 매우 평화스럽다. 그곳에서 매주 발간하는 <주간 무슬림>이라는 소책자가 있는데, 내용 구성은 설교 한 편, 하디스(무함마드 언행록) 한 편과 그 해설, 파트와(이슬람의 신앙 칙령) 소개, 주간 소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국인을 위해 영문 번역도 함께 싣고 있어 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매우 충격적인 가르침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주간무슬림 1111호(2013.2.1.)> 7쪽
◦ 오늘의 하디스-이븐 압바스(알라께서 그를 기쁘게 받아주시기를)가 예언자(그분에게 알라의 평화가 깃들기를)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화가들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들이 그렸던 초상화들에 대해 지옥에서 죄를 꾸짖으실 것입니다 … 만약 반드시 그려야 한다면 동물이 아닌 것이나 식물의 그림을 그리십시오.’(알부카리. 무슬림) 

◦ 해설: 화가들은 그들이 얼마나 그림을 그렸는지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가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 벌도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식과 같은 의식이 있을 때 사진이나 영화를 찍는 사람들은 그들이 여러 사람들을 동시에 촬영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행위들이 샤리아에 따라 금지되는 사항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태만함으로 인하여 여전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지옥에서 응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신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배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7세기에 살았던 무함마드가 그림을 싫어했다는 이유로 21세기 현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도 주변의 화가나 사진사들에 대해서 증오와 분노가 일게 될 것이다. 물론 보통의 무슬림들은 그런 율법이 있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헌신된 무슬림, 즉 원리주의 무슬림들은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도 그를 폭행하고 테러를 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누군가 그 일을 나서서 행하면 손뼉을 칠 것이다.

혹은 ‘알라의 심판을 이행한다’는 사명감으로 자신이 직접 화가들에게 테러를 하고, 그것 때문에 처벌을 받더라도 신앙을 위해 받는 핍박이기에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해서도 이런 하디스가 있다. “언젠가 무슬림들 중에 불법적 성행위나 알코올이나 실크를 입는 것이나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알라께서는 하룻밤 사이에 그들 위에 산들이 무너지게 할 것이며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은 돼지와 원숭이가 되어 부활의 날까지 남게 될 것이다.”(Bukhari, Volume 7, Book 69, Number 494v)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괴로워하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비상식적인 교육이 이뤄지도록 묵인할 수 있을까?

<주간무슬림1215호(2015.2.6.)> 5쪽
◦ 코를 통해서 사용하는 점안액은 단식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왜냐하면 코에 넣는 점안액의 경우 바로 목을 통해서 넘어가기 때문에 단식의 의도가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 글은 이슬람의 금식기간인 라마단(이슬람력 9월)에 지켜야 할 수칙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이슬람권에 살 때 해마다 라마단 기간이 되면 정확한 금식법에 대해 샤리아 전문학자들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방송이 TV에서 많이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 

무슬림들은 금식이 무효(버텔)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많은 질문을 한다. 위의 경우는 코에 약을 넣는 것도 목을 통해서 약이 넘어가면 금식이 무효가 되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라마단 기간에 병환 중인 부모님을 위해 요리를 해야 하는데, 그 때 코로 음식 냄새가 들어가면 금식이 무효가 되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랬다. “냄새가 들어가는 것까지는 괜찮으나 그 냄새로 인하여 생긴 침을 삼키면 금식은 무효가 된다.” 이러한 세세한 부분까지 샤리아(율법)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하는 것이 이슬람의 실상이다. 

사실 해가 있을 동안 음식이나 물, 심지어 침도 삼키면 안 된다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라면,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로만 머물러야 하고, 결코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라마단 기간이 6개월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남극과 북극의 백야(白夜) 현상과 겹치게 되면 그곳에서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 이기 때문이다.


  
<주간무슬림1269호(2016.2.19.)> 4-5쪽
◦ 따라서 압제자 앞에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알라의 길에서 가장 큰 지하드(알라의 길에서 옳은 일을 위해 하는 투쟁)입니다… 그 결과 알라의 주권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전투에서 싸우는 사람은 전투가 어떻게 끝날지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두려움과 희망을 함께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열심히 싸우도록 합니다… 지하드는 개인과 사회가 현세와 내세의 행복에 이르기 위한 정의로운 체계를 세우는 것이며 알라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를 알라의 주권 하에 들어가게 하는 숭배의 행위입니다. 

이 가르침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매우 의로운 교육이 될 수도 있고 매우 위험한 교육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지하드’는 ‘알라의 길에서 옳은 일을 위한 투쟁’이라고 정의한 후에, 그 목적은 알라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무슬림들은 승리를 위하여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일’이란 ‘믿는 자(무슬림)나 믿지 않는 자(비무슬림) 모두를 알라의 주권 하에 들어가게 하는 지하드 행위’를 의미하며, 이는 거룩한 예배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을 단순한 이론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샤리아를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는 헌신된 원리주의 무슬림들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며, 이를 실천한다면 매우 심각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은 알라의 주권이 실현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가 실행되고 있는 나라이다. 이곳에서 ‘정권을 잡고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알라의 주권을 인정할 때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곧 국가 지도자들을 암살하는 등의 테러를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간무슬림1269호(2016.2.19.)> 4-5쪽
◦ 알라에게 맹세하지만 여러분은 선행을 촉구하고 악을 금하며 박해자의 손을 제지하면서 그들에게 정의를 실천하고 진리의 길을 걷도록 촉구해야 하느니라. 소홀히 할 경우에는 알라께서 그 박해자들과 함께 여러분에게도 징벌을 내릴 것이며 유대인들처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니라.(아부 다우드와 티르미디가 전함) 여기서 ‘박해자의 손을 제지하면서 진리의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것은 무슬림들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따르지 않는 정부를 공격하라는 지하드 명령이다. 만일 이 일에 소홀히 할 경우에는 알라의 징벌을 받게 되며 유대인처럼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슬람은 ‘유대인들은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기정사실화 하여 가르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간무슬림1215호(2015.2.6.)> 5쪽
◦ 이슬람의 예절 26번- “형제”라는 단어는 무슬림에 국한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주간무슬림1222호(2015.3.27.)> 6쪽
◦ 이슬람의 예절 25번- 비무슬림에게 메시지를 보낼 경우 ‘앗쌀라무 알라만 이타바아 알-후다’(바른 길을 가는 자에게 평화가 있기를)라는 서면 인사도 가능합니다.

◦ 이슬람의 예절 27번- 다른 무슬림에게 구두(통화) 혹은 서면으로든 ‘앗쌀라무 알레이쿰’으로 시작과 끝을 맺어야 합니다.

◦ 이슬람의 예절 28번-비무슬림에게 인사하는 것은 비이슬람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 ‘앗살라무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은 무슬림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교리가 매우 배타적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상식이다.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거부한다. 심지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비무슬림들은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정의한다(꾸란8:55). 사람만 보면 물어뜯고 공격하는 사악한 짐승은 가축이나 애완동물처럼 사육이 불가능하다. 가장 손쉽게 처리하는 방법은 죽이는 것이다. 위의 글은 <이슬람의 예절>이라는 좋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형제’라는 단어는 무슬림들에게만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비무슬림들에게는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뜻의 “앗쌀라무 알레이쿰”이라는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비무슬림들에게는 평화를 기원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슬람의 율법대로 비무슬림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과 평화공존을 거부하는 교리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이런 교육을 제재할 방법은 아직 없지만, 그들이 이렇게 상식에 어긋나는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소위 인권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 한다는 명목으로 모스크에서 행해지는 이런 반사회적인 교육들을 보호하고 도와왔다. 심지어 이제는 이슬람에 대해 비판하는 말도 할 수 없도록 법제화시켜 놓았다. 그래서 유럽의 무슬림들은 본토인들과 법적으로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고 자라고 몸담고 있는 사회가 알라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슬람의 샤리아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사회를 파괴시키는 테러범들을 양산하는 교육을 마음 놓고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늦기 전에 정신 차리고 이슬람 원리주의 교육 실태를 파악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자칫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 교육들이 신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정황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입 다물고 있으면 유럽처럼 언제 어디서 테러가 발생할지 모르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야 할 처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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