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9 (수)

  • 흐림동두천 -2.0℃
  • 구름조금강릉 4.1℃
  • 구름많음서울 -0.3℃
  • 대전 5.4℃
  • 흐림대구 7.2℃
  • 흐림울산 7.9℃
  • 흐림광주 7.9℃
  • 흐림부산 8.4℃
  • 흐림고창 6.8℃
  • 흐림제주 12.4℃
  • 구름많음강화 -1.3℃
  • 흐림보은 4.5℃
  • 흐림금산 5.2℃
  • -강진군 8.8℃
  • 구름많음경주시 7.4℃
  • 흐림거제 9.1℃
기상청 제공

기획.특집

태양신과 신사참배

이상원 목사 | 예수사랑교회

 

 

자연숭배와 조상숭배


신도(神道)는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과 일본인의 삶의 태도, 그리고 국가 이념의 총제적인 개념이다. 일본인에게 두려움과 놀라움을 주는 자연현상과 자연물, 신화적 인물과 역사적 위인, 조상들의 영(靈) 등은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되어 800만 신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는 신도의 제사의식을 행하는 곳이 신사(神社)이다.


신도의 가장 큰 신(大神)은 태양여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천조대신은 일본 황실의 조상이며 일본 천황은 그 직계 후손으로 믿는다. 그래서 일본 천황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긴다. 일본의 국명과 국기는 태양신 숭배를 표현한다. 일본(日本)은 ‘태양의 기원’이라는 뜻이고 국기의 흰 바탕 위에 붉은 원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원시종교인 신도는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의 영향을 받아 신도사상이 만들어진다. 8세기, 불교의 많은 영향을 받은 신도는 절을 수호하기 위한 신사(神社)가 불교사원 경내에 세워지고 신도의 가미(神)들에게 보살 칭호가 붙여진다. 그리고 일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신도의 가미로 나타났다는 사상이 나온다.


13세기, 신도사상이라 할 수 있는 ‘이세신도(伊勢神道)’는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라는 경전을 갖는다. 일본은 두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1274, 1281년)으로 국가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신도오부서 경전에는 ‘신의 나라’라는 신국(神國)사상이 나온다. ‘신의 신성’과 ‘신의 나라’에 대한 언급은 아주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세신도’는 불교용어를 금지하는 등 반불교 사상의 원조가 된다.


18세기, 이세신도는 불교나 유교 등의 외래 사상을 배격하고 일본의 전통적이고 고유한 것을 찾으려는 ‘고학신도(古學神道)’로 발전한다. 고학신도 사상은 군국주의적인 천황제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국가신도와 군국주의


일본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1889)은 700년간 지속된 막부(幕府)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체제로 변혁을 이루었다. 메이지 정부1는 천황중심의 정권수립을 했지만 정치기반이 약하여 반정부파와 내전을 겪어야 했다. 1870년 강력한 통치제제를 위한 천황제의 통치이념을 민간신앙 차원의 신도를 국교(國敎)적 지위로 올린 후에 국가신도를 통해 구축한다. 이에 따라 전국의 모든 신사(神社)는 황실의 조상신을 제사하는 이세신궁(伊勢神宮) 아래에 두며 등급에 따라 관리하여 황실의 조상과 국가공로자의 위패를 모시는 국가신도로 공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신도의 국교화 정책은 내·외부로부터 종교의 자유에 반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1882년 메이지정부는 국가신도에서 종교의 기능을 제거하는 ‘비종교화’ 조치를 취한다. 이것을 ‘신사신도’, 원래 신도를 ‘교파신도’로 구분한다. 신사신도가 국민의례가 됨으로 인해서 신사신도의 참배는 국민의 의무가 되었다. 그런데 신사신도는 교파신도와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날짜에, 같은 원시적인 종교의식 등을 똑같이 같은 신사에서 거행함으로 그 구분은 형식적 것에 불과하다.


1889년 제국헌법 제정 이후 ‘신도 비종교론’ 주장이 주류가 되어 1890년 신도가 교육의 근간이 되는 교육칙어(敎育勅語) 정책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신도에 초종교적 절대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신도가 타종교를 통제하게 되었다. 신도는 종교가 아니므로 정교분리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종교자유와 정교분리에 대한 국내.외 비판을 피하기 위한 술수였다. 1891년 교육칙어 봉독과 신사참배가 소학교의 행사로 제도화됨으로 천황을 절대화하는 국가신도의 교리가 사상적, 법적으로 완성되었다.


쇼와 정부2는 신사의 통폐합, 제사의 획일화 등으로 신사제도를 정비하여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닌 국민통합을 상징하는 행사로 정착되었다. 일본이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을 승리로 이끈 가장 큰 요인은 국가신도를 통해 국론을 결집시킨 것이다. 국가신도로 대변되는 야스쿠니(靖國) 신사3의 원래 명칭은 쇼콘사(招魂社)였다. 메이지유신직후인 1869년에 유신4을 위해 숨진 영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 많은 전사자들을 냈던 메이지 정부는 민중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야스쿠니 신사와 각 지방에 호국신사를 세워 전사자들의 영령을 안치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 3성을 점령한다. 1945년까지 15년 동안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대륙진출 과정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는 추모시설을 넘어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를 합리화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것은 군국주의 확대 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였기 때문이다. 국가신도는 국민들에게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이고, 일본열도는 신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신국(神國) 사상과,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우월의식을 주입하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며 ‘천황을 위해 죽으라’는 명령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요한 시기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진행하고 쇼와 천황이 몸소 신사에서 참배하는 모습들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다.

 

황국신민화 정책과 신사참배

 

임진왜란 후 1609년 조선과 일본이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부산진에 처음 신사를 세웠다. 나중에 용두산 신사로 불렸다. 본격적으로 조선 땅에 신사가 세워진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이다. 일본은 가는 곳마다 신사를 세워 천조대신과 메이지천황을 숭배하였다. 1898년 남산공원의 태신궁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42개 신사를 세워 국가신도를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었다. 1917년 평양 을밀대가 있는 높은 언덕에 신사가 세워지고, 5년 공사 끝에 1925년 서울 남산에 신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이 세워진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신궁 준공식인 진좌제(鎭坐祭)에 앞서 어령대(御靈代)5를 부산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봉영식에 경부선의 각 역과 서울에 학생 동원령을 내렸다. 기독교학교들은 학생들을 봉영식과 진좌제에 참석시키지 않도록 결의하였다. 이때만 해도 총독부는 3.1운동 이후 조선에 대한 유화책으로 기독교학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이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사상적 통일을 위해 신사참배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신사신도를 애국교육 정책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먼저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본의 신사는 황실의 조상, 혹은 국가원로를 제사하는 곳인데 여기에 참배하는 것은 제국 시민 된 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고래로 경신숭조(敬神崇祖)는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 방침이다.”


그러나 기독교학교들이 이를 거부함으로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전남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 ‘만주사변 기원제’ 참석을 거부하였다. 9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개의 학교가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 참석을 거부하였다. 1933년 9월 원산 진성여자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난자 위령제’ 참석을 거부하였다.


신사참배 문제가 크게 확대된 사건이 발생했다. 1935년 11월 14일 평남도청에서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평남도지사(일본인)가 개회 벽두에 평양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자 숭실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의성,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M. H. Lee)는 기독교인의 교리와 양심상 이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총독부는 거부한 교장들을 파면시켰다. 이런 강경책을 쓴 이유는 대외적인 요인도 컸지만 한국교회와 선교사 간을 분열시켜 기독교학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려는 의도가 컸다.


기독교학교 교장의 파면 사건은 장로회 한국선교부와 선교학교에 영향을 끼쳐 학교의 존폐여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숭실학교 교장 맥큔은 박형룡과 주기철 등에게 최종 자문을 구한 후에 조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진리와 양심의 자유에 반하여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사 예식에 참여하되 종교적인 부분에서만 참여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1936년 9월 미 북장로회 한국선교부는 실행위원회를 열어 ‘교육철수 권고안’을 69:16으로 가결하여 평양의 3숭(숭실, 숭실전문, 숭의)을 비롯하여 경신, 정신, 계명 등 9개 학교를 폐교하기로 결의하였지만 최종 3숭만 폐교원을 제출했다.

 

 

1936년 11월 미 남장로회 한국선교부는 교육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의하고 광주 수피아와 숭일학교,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순천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가 폐교를 신청했다.


호주장로교는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에 모든 학교를 폐쇄하였다. 캐나다선교부는 1925년 감리교회 및 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로 개편한 후 신사참배 문제를 타협적으로 처리하여 학교를 계속 운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황국신민화 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자 조선총독부는 그 강요를 교회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여호와인가 바알인가


총독부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례일 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신사신도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일본은 신(神)의 나라이고, 최고 신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이며, 가장 실질적인 신은 천조대신의 손자이며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이며, 그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천황에게 국민은 죽음으로써 충성할 것이며, 천황의 조상신들을 모신 신사에 참배치 않는 것은 비국민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위한 정신개조 운동을 강화하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다)를 강조하면서 일본 황실의 조상과 전쟁 유공자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참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에 신사 설립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서울 남산의 경성신사와 부산 용두산신사를 각각 국폐소사(國幣小社)로 승격시켰다. ‘1면 1신사 정책’을 세워 산간벽지의 면단위까지 신사를 세우게 하였다. 1945년 6월까지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神祠) 1062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하여 총독부는 파출소, 주재소 등 관공서와 학교에 호안덴(奉安殿:봉안전)을 설치하고 호안덴을 보호하기 위해 숙직실도 마련하였다. 일반 민가에는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하여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했다. 호안덴과 가미다나에는 태양여신과 천황의 위패, 신주와 부적 등이 담겨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서는 미소기하라이(禊祓) 의식을 행해야 했다. 미소기(禊)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것, 하라이(祓)는 먼지와 더러움을 털어내는 것을 뜻한다. 즉 더러운 옛 것, 비일본적인 것, 비신도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 등을 씻어 없애는 신도(神道)의 결례의식이다. 신도청정, 신도침례라고도 하며 서울한강과 부산송도 앞바다를 비롯한 전국의 강과 바다, 호수 등에서 행해졌다. 신도 승려는 ‘천조대신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고백한 사람에게만 미소기하라이 의식을 진행했다. 기독교인이 신도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신도(神道)로 개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는 주일예배 전에 국민의례를 먼저 해야 했다. 그 국민의례는 실제로 신도 의식이었다. 교회당 안 동편에 가미다나(神棚)를 모시고 일본의 가미(神)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먼저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きみがよ)를 제창하고 대동아전쟁 필승 기원 묵도를 한 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암송한다. 마지막에는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우미유가바6를 합창한다.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인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공식적 모임에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 한다.

 

황국신민서사(아동용)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 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서사(성인용)
1.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니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리라.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리라.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리라.

 

이렇게 국민의례를 한 후에야 교회에서 기독교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예배드리다가 12시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일제히 일어나서 천황 궁성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 황거요배)를 거행한다. 교회에서도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태양신과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
는 신도 의식이 항상 우선해야 했다.

 

-------------

1 메이지 정부는 메이지(明治) 천황의 집권 시기(1867-1912)를 말한다.

2 쇼와 정부는 쇼와(昭和) 천황의 집권 시기(1926-89)를 말한다.
3 1879년 ‘평화로운 나라(靖國)’라는 의미를 지닌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의 신을 추모하는 신사이다.
4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하는 점진적 개혁을 말하지만 실제는 혁명에 해당한다.

5 진좌제는 일본천황의 조상신의 혼이 있다고 하는 함(函)을 일정한 자리에 두는 행사, 어령대에는 태양여신(천조대신)의 상징물과 천황 조상신의 위패가 들어있다.

6 우미유가바(うみゆかば)는 전쟁터에 나갈 때 부르는 장송곡풍의 군가이다. “바다로 나간다면 나의 시체는 바다에 띄우고, 산에 나간다면 초원에 버린다. 천황의 곁에서 죽어도 뒤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 이상원
한양대 공과대학,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CBMC, 총회직장사역연구소에서 사역을 하였고, 현재 예수사랑교회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

 

[이 글은 월간 JESUS ARMY 2021년 9월호에서 전재한 것입니다.]


뉴스윈스페셜

더보기
'복음통일 컨퍼런스', 유튜브ㆍ줌으로도 생중계 진행
복음통일 컨퍼런스(제27차 북한구원 금식성회)가 1월 17일(월) 오후 1시 30분부터 21일(금) 오후 3시까지 온라인 상으로 개최된다. 컨퍼런스의 전 과정이 유튜브와 줌(ZOOM)을 통해 생방송으로 전 세계로 방송되며, 북한구원과 복음통일을 위해 첫 3일은 금식(7끼)으로 진행된다.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 교수)이 주최하는 제27차 북한구원 금식성회를 2022년을 ‘복음통일의 초석을 놓는 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복음통일 컨퍼런스’로 명명되었다. 이번 제27차 복음통일 컨퍼런스의 주제 성구는 다음과 같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6) 이번 복음통일 컨퍼런스는 남한교회와 탈북민교회, 해외교포교회 그리고 북한지하교회가 함께 하는 성회이다. 에스더기도운동은 작년 봄부터 매주 월요일 철야기도회를 북한지하교회와 지하교회 성도들을 위한 철야기도회로 드렸고 이 기도회의 설교 말씀을 제주 극동방송을 통해 북한으로 송출해왔다. 그래서 에스더기도운동 이용희 대표는 북한에 송출되는 메시지를 통해 북한지하교회 성도들에게 복음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한구원 금식성회/복음통일 컨퍼런스 기간 동안 함께 금식하
"예수님도 2천년전 태아로 오셨다", 태아로 오신 예수님 성탄카드 나누기 운동 시작
“예수님도 2천년 전 태아로 이 땅에 오셔서 낙태되지 않아서 태어날 수 있었어요” 현재 전국 120개 지역에서 거리생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은 이번 성탄절을 맞아, 태아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태아생명의 소중함을 담은 성탄연하장을 제작, 배포하는 낙태반대 태아생명 존중 가두 캠페인을 갖는다. 그동안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 등의 형태로 생명존중운동을 실시해온 이용희 대표는 “지난 3월, 34주된 태아를 낙태로 죽인 의사가 낙태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며 “이번 성탄절을 맞아 태아로 오신 예수님의 이미지가 담긴 성탄연하장을 나누며, 생명의 소중함을 선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최근 극동방송 1분 칼럼을 통해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여부 판결문에서 낙태죄 폐지를 반대했던 2명의 헌법 재판관들은 ‘우리 모두 태아였다’라고 선언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낙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2017년 국회 회의실에서 대한산부인과 의사회가 주최한 세미나 발표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낙태 건수는 하루에 3000건으로, 연간 약
'복음통일 컨퍼런스', 북한구원 금식성회 시작된다
지난 15년간 북한구원과 복음통일을 위해 꾸준히 기도해온 에스더기도운동(이용희 교수)은 내년 1월에도 북한구원 금식성회를 개최한다. 2022년 1월 17일부터 5일간 진행되는 북한구원 금식성회는 첫 3일은 금식(7끼)으로 진행되며 2022년을 ‘복음통일의 초석을 놓는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복음통일 컨퍼런스’(제27차 지저스아미 컨퍼런스)로 명명했다. 에스더기도운동은 ‘복음통일 컨퍼런스’ 40일 전인 12월 8일부터 ‘40일 특별철야기도회’와 12월 14일부터 ‘3일 금식성회’를 통하여 내년 겨울에 개최되는 북한구원 금식성회인 ‘복음통일 컨퍼런스’를 기도와 금식으로 준비한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과 확산으로 인하여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가운데 있는 북한 김정은 정권은 더욱 폭압정치를 하여 장마당마저 심하게 통제하고 운영을 제한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식량 배급이 끊긴 북한주민은 또 다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으며 혹독한 겨울을 맞고 있다. 40일 특별철야기도회 중에 76년간 김씨3대세습 독재정권 아래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북한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자유롭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복음통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것이다. 또한 현 정부와 국회

자유통일당, “경악스러운 편파보도”, MBC 박성제 사장·편집자·해당 기자 등 관계자들을 고발
“악의적이고 허위 방송으로 윤 대통령을 국내외적으로 비난받게 하고 한미동맹을 위협하면서 국익을 해친 것은 매국 행위이자 사실상 방송 쿠데타이다. 관계자 등은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자유통일당(대표 전광훈 목사)이 30일 성명을 통해 최근 MBC의 윤석열 대통령 관련 보도를 강력 규탄했다. 자유통일당은 “경악스러운 편파보도", MBC 박성제 사장·편집자·해당 기자 등 관계자들을 고발한다!”는 제하의 이 성명에서 “악의적이고 허위 방송으로 윤 대통령을 국내외적으로 비난받게 하고 한미동맹을 위협하면서 국익을 해친 것은 매국 행위이자 사실상 방송 쿠데타”라며 “관계자 등은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다음은 해당 성명 전문이다. [자유통일당성명서] “경악스러운 편파보도”, MBC 박성제 사장·편집자·해당 기자 등 관계자들을 고발한다! [부제] 악의적이고 허위 방송으로 윤 대통령을 국내외적으로 비난받게 하고 한미동맹을 위협하면서 국익을 해친 것은 매국 행위이자 사실상 방송 쿠데타이다. 관계자 등은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자
‘북한선교의 현장이고 실제이자 통일준비의 길잡이’… ‘2021 탈북민교회 통일준비포럼’ 진행
북한기독교총연합회(북기총), 총신대 평화통일개발대학원이 주최·주관한 ‘2021 탈북민교회 통일준비포럼’이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 종합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포럼은 북기총 유튜브 채널과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에서도 진행됐다. 정형신 목사(뉴코리아교회 담임목사)는 이날 첫 번째 순서로 ‘탈북민교회 기본 현황과 코로나19가 목회 현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 발제했다. 신학대학원 1학년 때부터 탈북민 사역을 시작한 정형신 목사는 국내 탈북민 사역과 북한 선교의 확산, 남북연합예배의 비전으로 탈북민 세 가정과 2011년 뉴코리아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4대째 북한 지하교인인 김은진 사모(통일부 통일교육원 통일교육 강사)와 결혼하여 동역하고 있다. 발제를 통해 정 목사는 “3월 말 현재까지 국내에는 총 68개 탈북민교회가 설립됐고, 설립연도는 2000년 이전에 2개, 2000년대 17개, 2010년대 47개, 2020년대 2개였다”고 밝혔으며, “68개 탈북민교회 중 북한 출신 사역자가 세운 교회는 42개, 남한 출신 사역자가 세운 교회는 25개, 중국 출신 사역자가 세운 교회는 1개이다”라고 말했다. 이 중 대성공사 평화교회를 포함한 10곳은 현재 문을

포토뉴스‧만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