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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칼럼

국방저널에 실린 “이슬람의 팽창, 어떻게 가능했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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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목사 | 한장총이슬람대책위원장

 

2021년 1월호 국방 저널에 “이슬람의 팽창, 어떻게 가능했나?”라는 칼럼이 실렸다. 읽어 보니 지나치게 이슬람을 미화시킨 글이었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이슬람의 영향력이 강화됨에 따라 이슬람을 찬양하는 글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2021년 현재 UN회원국이 193개국인데 그 중 57개국이 이슬람협력기구(OIC:Organization of Islamic Cooperation) 회원국이다. 그러니 국제무대나 외교 분야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사람들이나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이슬람에 우호적인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는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떤 자료를 인용할 때는 이것이 의도적으로 미화된 거짓 자료가 아닌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의도는 세계적인 종교인 이슬람을 모욕하거나 흠집을 내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도적인 거짓말을 사실로 인식하고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가능하면 줄이기 위해서일 뿐이다. 더구나 이 글이 실린 ‘국방저널’이라는 잡지는 국방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대한 민국 정부 예산으로 출판되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가지고 사실 확인을 반드시 거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쓴 C씨는 한국정치를 전공한 모 대학 정치국제학과 현직교수라 한다. 이 분이 무슬림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글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무함마드가 알라의 목소리를 들었다”든지, “이슬람이 처음 세계에 선보인 것이 620년이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슬람에 대한 초보적인 수준 의 내용들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봐서 이슬람 전공자도 아니고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칼럼을 쓰기 위해서 이슬람 전문가가 쓴 매우 미화된 어떤 자료를 참고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는 뛰어난 전략가였나?

 

한국의 국군 지도자들이 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전략을 본받아야 하는가? 그는 과연 칭송받을 만한 사람인가?

 

C교수가 인용한 바드르 전투(624년)는 이슬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무함마드는 전쟁에서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신의 사도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바드르 전투는 사막을 왕래하면서 장사하는 무역상단을 공격하여 상품을 노획하기 위한 부끄러운 목적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주후 624년 메디나의 통치권을 손에 쥔 무함마드는 경제문제 해결을 위하여 수공업이나 농사 혹은 축산이나 무역 등의 정상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력한 군대를 키워 주변의 다른 부족들을 공격하여 그 재산을 탈취해서 추종자들에게 나눠줌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바드르 전투는 무함마드의 고향 꾸라이시 종족의 아부 쑤피안이 이끄는 대상 무역 상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무함마드는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싸움에 능한 310명 정도의 습격팀을 구성하여 길목을 지키며 잠복시켰다. 미리 정탐군을 보내 파악하기로는 상단을 지키는 사람들은 30~40명 정도로 이들만 사살하면 엄청난 탈취물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함마드는 대상들이 전투 중에 물을 조달할 수 없도록 주변의 우물들을 메워버리는 등 철저히 준비했다. 그런데 정탐꾼들 에 의해 이 음모가 알려지고 말았다. 그러자 상단을 보호하기 위해서 급히 결성된 꾸라이시 연합군이 달려왔다. 쉽게 생각했던 무역상단 공격이 예기치 않은 전면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메카와 메디나의 거리는 약 450Km 정도다. 전투가 벌어진 바드르는 무함마드가 살고 있는 메디나에서 50~60Km 정도 되는 지점이지만 메카의 꾸라이시 종족에게는 거의 400Km를 달려와야 하는 거리다. 꾸라이시 종족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 무역을 하는 여러 부족들과 연합군을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어서 그 당시 아라비아에서는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급조되었지만 약 1,300 여명의 군대가 삽시간에 모였다.

 

그러나 바드르로 달려가던 중 아부 쑤피안의 상단이 공격을 피해 다른 길로 안전하게 대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300명 정도의 바누 자흐라 부족은 상단이 안전한데 왜 불필요한 전쟁을 하느냐고 돌아가 버렸다. 바누하심 가문도 돌아가려 하자 기왕에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저지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은 싸울 의욕이 별로 없는 상태였다. 정탐꾼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군대는 모두 합쳐서 300명 정도인데 추가 병력 지원 계획도 없고 매복병들도 없다고 하자 모두 안심하고 승리를 기대했다. 한편 자신들이 싸워야 하는 무함마드의 군대에는 자신들의 친인척이 있다고 하자 싸우려는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군대는 입장이 전혀 달랐다. 잠자는 사자를 잘못 건드린 격이다. 무함마드가 만일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그의 명성과 입지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 차후 활동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알라의 계시가 내려왔다고 하면서 천사들이 도울 것이라고 부추기며 끝까지 싸우자고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대표 전사들을 뽑아 결투를 벌였다. 그런데 메카의 꾸라이시 군대 중 가장 뛰어난 장수로 소문났던 우트바, 샤으바, 알왈리드 등이 무함마드 측의 장수 함자, 알리에게 살해당하자 이들의 사기는 곤두박질하게 되었고, 사기가 무너진 전투의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다. 무함마드의 군대는 14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메카 군대는 70여명의 사상자와 70여명의 포로를 남기고 패퇴하였다. 무함마드는 포로들을 몸값을 받고 풀어 주었다.

 

바드르 전투의 승리는 무함마드의 전략이 뛰어났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상황과 병사들의 입장이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반면, 상대인 메카의 꾸라이시 군대는 제대로 전쟁을 준비할 틈도 없이 급히 모여서 거의 400Km를 달려와서 피곤에 지친 상태였고 싸울 이유도 의욕도 그다지 없었던 전쟁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바드르 전투에서는 무함마드의 군대가 불리한 여건에서도 승리했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필자가 독자들에게 역사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편파적으로 무함마드를 미화시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드르 전투 후 1 년여 만에 있었던 우후드 전투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C교수가 감췄던 우후드 전투(625년)에 대해 알아보자. 무함마드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이었을 것이다. 바드르 전투에서 무함마드의 군대를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가볍게 보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한 꾸라이시 족속은 복수의 칼을 갈면서 근 1년 동안 철저히 준비해 서 무함마드의 주둔지 메디나의 뒷산 우후드로 출정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 요소요소에 궁수들을 배치하여 앞장서서 달려오는 메카의 장군들을 차례차례 사살하자 메카군은 사기가 저하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도주하면서 1년 전의 패배가 재현되는 듯 싶었다.

 

그러자 무함마드 군대는 승리를 확신하고 기뻐하며 메카군들이 버리고 간 전리품을 수집하기 위해 숨어있던 궁수들이 무기를 두고 매복처에서 나왔다. 정신없이 전리품들을 모으고 있을 때 도망치던 메카군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와 반격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메디나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단 두 명만 남아서 무함마드를 지키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이때 돌에 맞아 이가 부러지고 이마와 어깨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철모에 달린 고리가 무함마드의 턱에 깊이 박혀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하지만 메카군이 무함마드와 얼굴이 비슷한 사람을 죽이고는 무함마 드를 죽였다고 착각한 덕에 중상을 입은 무함마드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산발적으로 숨어있던 궁수들에 의해 피해자들이 생기자 메카군이 철수 준비를 마쳤을 때 무함마드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대로 철수했다. 이것이 우후드 전투였다.

 

 

그 후 무함마드는 메디나 부근에 평화롭게 살고 있던 유대인 나디르 족속을 공격하였다. 그들이 자신을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함마드 군대는 유대인 마을을 급습하여 대추야자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집과 농지를 버리고 떠나라고 했다. 갑자기 삶의 터전을 빼앗긴 유대인들은 주변의 카이바르 등 다른 유대인 마을로 피했고, 무함마드 군대가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몰라 아라비아 최강인 메카의 꾸라이시 동맹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마침 무함마드 군대를 언젠가 응징하고 싶었던 꾸라이시는 대군을 모집하여 메디나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전쟁이 참호 전투(627년)였다. 무함마드의 군사들은 말이 건너뛸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참호를 파 놓고 450Km를 달려온 메카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카군은 참호를 보고 말이 건널 수 없게 되자 캠프를 치고 메디나를 포위한 채 서로 창을 던지며 산발적 전투만 벌였다. 그러던 중 때마침 불어 닥친 겨울철의 폭풍우 때문에 이번에도 눈물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가 항상 뛰어난 전략을 가지고 적은 숫자로 많은 적군들을 물리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려는 의도적 눈가림이라고 생각된다.

 

이슬람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나?

 

이슬람이 지배한 곳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것은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순수한 거짓말이다. 인권이 매우 발달한 21세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슬람은 아직도 인간의 기본인권이라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슬림형제단의 영적 지도자이며 이슬람 관련 책을 120권이나 쓴, 자타가 공인하는 이슬람의 권위자 유수프 알 가라다위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Mubashir TV 방송을 통해서 “배교자를 죽이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오래 전에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말은 사실이다. 주후 632년 무함마드가 죽었을 때 수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버리고 옛 종교로 돌아가버렸다. 이를 방치하면 이슬람이 소멸될 위기였다. 그때 새로 칼리프(정치와 종교의 권력을 함께 가진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는 배교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발견되는 배교자들마다 무조건 죽이라고 했다. 이 때 격렬한 전쟁이 일어났고 양측에서 수많은 사망자들이 나왔는데 이를 이슬람 역사에서는 ‘배교자들과의 전쟁(Ridda: 632-633년)’이라고 부른다.

 

이 때 배교자들을 모두 죽였기에 이슬람은 지금까지 존속될 수 있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어떻게 이슬람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할 수 있겠는가? 이슬람은 싫지만 공개적으로 배교하고 처형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냥 무슬림인척 하면서 대충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슬람에서 종교의 자유 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었다.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가 메카 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했을 때 세 딸(자이나브, 루카이야, 움 쿨숨)은 결혼을 했고 파티마는 아직 어렸다.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가 내려왔다며 무슬림 여자와 비무슬림 남자의 결혼을 금지시켰다. 그는 결혼한 세 딸에  남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이혼하라고 했다. 이에 루카이야와 움 쿨숨은 이혼을 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자식을 둔 자이나브는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했다. 무함마드 일행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사할 때도 자이나브는 함께 가지 않았다. 바드르 전투 때 자이나브의 남편 아부알 아스는 무함마드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자이나브는 무함마드의 첫 아내 카디자가 살아있을 때 줬던 목걸이를 무함마드에게 보내면서 남편을 풀어달라고 했다. 무함마드는 그 청을 수락하여 풀어 주면서 그 당시 임신 중인 딸을 메디나로 보내라고 했다. 남편은 울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이나브는 충격으로 아이가 유산되고 말았다.

 

무함마드의 친딸들이었음에도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정이 파괴되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볼 때 “이슬람이 점령한 지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이슬람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면 왜 무슬림 출신의 개종자들이 두려워하며 자신의 개종을 숨겨야할까를 생각해보라.

 

무함마드 시대에 집단학살은 없었다고?

 

필자는 이슬람의 관대함을 이야기 하면서 “꾸라이자 부족과 같이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면 집단 학살은 적어도 무함마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꾸라이자 부족의 집단 학살은 왜 특별한 사례라며 논외로 하는가? 무함마드의 모든 말과 행동은 하디스(Hadith)에 기록되어 모든 무슬림들의 행동모범이 되며 이슬람 율법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분명한 끔찍했던 역사적 사실마저 눈감고 못 본 체 해주면서까지 왜 무함마드를 칭찬해야 하는지, 과연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자고 하는 것인지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500마일 떨어진 부족을 선제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칭찬하는데 말이 좋아 ‘선제공격’이지 전쟁을 생각지도 않고 조용히 살고 있는 마을에 군사들을 동원해서 죽이고 약탈하는 것이 과연 칭찬받을 일인지 묻고 싶다.

 

무함마드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꾸라이자 족속은 사람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아이들과 여인들과 재산을 손대지 않는다면 남자들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무함마드는 이들을 메디나로 끌고 가서 깊은 구덩이를 파게 한 후에 600~900명의 꾸라이자 족속 남자들의 목을 쳐 구 덩이에 쓸어 넣었고 그들의 재산은 압류하여 병사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여인들과 어린아이들도 병사들에게 노예로 나눠주었다. 병사들은 그들을 성노예로 삼든지 아니면 무기나 말과 교환했다. 무함마드도 라이하나 (Raihana)라는 유대인 여자를 전쟁포로로 취해 정식 아내로 삼고자 했으나 여인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을 한집에서 데리고 살았다.

 

항복한 비무장한 민간인들을 재판 없이 모두 죽이는 것은 누가 봐도 잔인한 짓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7세기에 본을 보였기 때문에 이것은 21세기뿐 아니라 영원히 무슬림들의 행동모범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무함마드의 행동모범은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불특정 다수의 집단학살로 계속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그 당시 이슬람권의 칼리프였던 오스만 터키는 아르메니안 기독교인들을 전쟁 중이 아님에도 150~200만 명을 집단학살 했다. 그 억울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이란의 아르메니안 집단거주지인 이스파한의 방크교회(Vank Church) 내의 박물관에는 발견된 집단 학살 의 증거들을 전시해 놓았으며, 박물관 정원에는 이 슬픔의 역사를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고 위령탑을 세워 놓았다. UN의 조사에 의하면 21세기에 들어서도 IS(Islamic State)에 의해서 2014년부터 3년간 집단학살 되어 묻힌 매장지 202곳에서 수만 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C교수는 무함마드가 메카에 무혈입성한 것을 칭찬하는데 이는 무함마드가 전쟁을 통해서 메카의 꾸라이시 부족을 이긴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후다이비아 조약’(10년간 평화 조약)을 맺어 그들을 안심시킨 후 2년이 채 안 되어서 1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소위 선제공격하여 메 카를 점령한 사건이었다.

 

또한 C교수는 이집트의 이슬람화 결과와 인두세를 칭송했는데, 이집트의 이슬람화 과정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소름끼치는 잔인한 역사였다. C교수는 이슬람이 부과한 인두세와 재산세가 이전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고 단언했는데 이는 의도적 미화라고 본다. 인두세라는 것은 무함마드가 점령한 지역 주민들의 목을 자르지 않는 대가로 부과하는 세금으로, 무함마드 이전에는 없던 세금이었다. 최근에 이슬람에서 지역주민들에게 거두었던 인두세가 얼마 정도의 금액이었는지를 밝힌 책이 나왔다. 이집트에서는 2디나를 지즈야로 거두었다고 했는데, 당시 재산이 4디나가 약간 넘으면 중산층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재산의 거의 절반을 빼앗아 간 셈이다.1

 

거듭 강조하지만 이 글은 누구의 잘못을 꼬집기 위한 것도 아니요, 누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 일방적으로 미화되는 이슬람을 보면서 최소한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나 피해를 줄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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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나빌,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와 이슬람의 이집트 침략, CLC: 서울, 2018, 148p

 

* 이만석

예장 통합 총회 파송 선교사로 20년간 이란에서 사역하다가 비자 연장이 거부되어 귀국하여 한국에서 이란인 교회를 설립하여 섬기고 있으며 한장총 이슬람대책위원장, 한교연 이슬람 대책연구원장, 예장통합 총회 이슬람대책위 전문위원, 무슬림선교훈련원장, 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 등으로 섬기면서 한국교회에 이슬람의 실체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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