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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칼럼

중앙일보의 “이슬람교,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나” 컬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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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목사 | 무슬림선교훈련원장

 

중앙일보가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컬럼을 계속 게재하고 있다. 독자들이 이슬람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을 바로잡아 주겠다는 좋은 취지겠지만, 사실상 이슬람의 입장에서 이슬람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이 기사들의 타이틀이 “○○○기자의 현문우답”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글자 그대로 현명한 질문에 대한 ‘어리석은 답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슬람은 이미 여러 번 강조했듯이 타끼야(Taqiya)라는 편리한 교리가 있어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이나 맹세까지도 교리적으로 허용된다(꾸란2:225, 꾸란3:28).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쓴 어떤 책이나 컬럼 등을 읽고 속아서 본의 아니게 이슬람 측에서 주장하는 거짓말을 대신 홍보해 주는 안타까운 현상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율법의 기초가 되는 꾸란(Quran)과 하디스(Hadith)를 직접 연구해 보고 그런 꾸란 구절이나 하디스가 어떤 배경에서 무함마드의 입을 통해서 언급된 것인지를 공부하고 난 후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무슬림들은 예수님을 어떤 시각으로 볼까?”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사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만 바르게 소개한다면 일상생활에 관련된 지엽적인 견해 차이는 넘어가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는 시각 차이는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교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작은 차이일지라도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기자의 견해는 보편적으로 무슬림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일간지를 통해서 아무 보충 설명 없이 독자들에게 전달될 경우, 이를 읽는 이들에게는 그 일간지의 신뢰도의 영향력으로 인해 마치 정설처럼 느끼게 할 것이다. 때문에 기사 내용 중 무엇이 문제이며 이에 대한 바른 정보가 무엇인지를 밝혀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한 뿌리에서 나온 세 가지라고?

 

기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을 한 뿌리에서 나온 세 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무슬림 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사실 이슬람은 알라(Allah)라는 아랍인들의 신을 여호와(Jehovah)라는 성경의 신과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꾸란을 통해서 알라라는 신을 살펴보면 도저히 성경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영원히 기억할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Jehovah)라고 천명하셨다(출3:15). 그런데 언제 이름을 알라로 바꾸셨는가? 알라(Allah)는 아랍 신의 고유명사이다. 이를 일반 명사의 신(God)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것은 일방적인 거짓 주장에 속는 것이다.

 

이를 알기 쉽게 증명해 보이겠다. 이슬람의 신앙고백은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것이다. 즉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메신저이다’는 뜻이다. 이를 아랍어로 고백해야 무슬림이고 한국어로 혹은 영어로 고백해도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아랍어 문장의 뜻을 분석해 보자.


LA(없다) ILAH(신은) ILA(외에는) ALLAH(알라), MUHAMMAD(무함마드는) RASUL ALLAH(알라의 메신저)


알라(ALLAH) 외에는 일라(ILAH)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라(ALLAH)는 고유명사고 일라(ILAH)는 “신(god)”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이다. 알라가 일반명사라면 “알라 외에는 다른 알라가 없다”라고 하든가 아니면 “일라 외에는 다른 일라가 없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알라 외에는 일라가 없으며”라고 고백해 놓고 알라가 신이라는 의미의 일반 명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뻔한 거짓말이다.

 

 

김 과장과 이 과장은 과장이라는 호칭은 같지만 고유명사가 다르므로 전혀 다른 인물인 것처럼 이슬람의 알라는 고유명사이며 성경의 여호와 역시 고유명사다. 신이라는 일반명사는 같을 수 있으나 고유명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꾸란에는 알라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 알라는 무함마드 당시 아랍인들이 진(Jinn)과 혈연관계가 있는 신이라고 했다(꾸란37:158).
◼ 무함마드 당시 아랍인들은 알라와 진(Jinn)을 파트너로 같이 섬겼다(꾸란6:100). 이 구절은 한글 최영길 역 꾸란에는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영마를 그분께 비유하여 거역하고 있으며...”)라고 의도적으로 오역하고 있다. 아랍어 원문은 “Jaalu(그들은 만들었다), Lilahi(알라를) Shuraka Al Jinna(진의 파트너로)”라는 뜻이다. 영문 꾸란 번역본 중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는 무신칸(Muhsin Khan)역에는 본 구절을 “Yet, they join the jinns as partners in worship with Allah.”라고 번역하고 있다. 솔직한 번역은 “그런데도 그들은 진들을 알라의 파트너로 함께 예배했다”는 내용이다.
◼ 무함마드 당시의 아랍인들과 그 조상들은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를 알라의 딸들이라고 불렀다(꾸란53-19-23).
◼ 알라는 꾸라이시(Quraish)족의 종족신이었다(꾸란106:1-3).

◼ 알라는 카아바 신전을 지키는 신이었다(꾸란106:3). 모든 꾸란의 번역본들은 알라가 ‘이 집의 주님(The Lord of this house)’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이 집’은 카아바 신전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 당시 카아바 신전에는 360여개의 우상들이 들어 있었으며 알라(Allah)는 그 신들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 인류를 창조한 후 ‘남자와 여자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창2:24)는 결혼 원칙을 정하신 그 하나님께서 무함마드에게 새로운 계시를 통해서 아내를 4명까지(꾸란4:3) 허락하셨겠는가?
◼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는 말씀으로 이혼을 금하신 그 하나님이, ‘이혼은 두 번까지 허락한다’(꾸란2:229)고 뜻을 바꾸셨겠는가?

 

그 외에도 참으로 많은 자료들이 꾸란을 통해서 알라(Allah)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임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아랍어 성경책이나 인도네시아어, 말레이시아어로 번역된 성경에도 하나님을 알라(Allah)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이 같다고 모두 같은 인물은 아니다. 이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이름이 같은 다른 신, 즉 동명이신(同名異神)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과 기독교와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라는 말은 무슬림 학자들이 주장하는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예수(Yasua)와 꾸란의 예수(Isa)


이 기사를 볼 때 기자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면서도 감추고 있는 부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랍어 꾸란에는 예수를 이싸(ISA)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아랍어 성경에는 예수를 야수아(YASUA)라고 표기한다. 이싸와 야수아는 전혀 다른 이름이다. 아랍어 원문에서 서로 다른 고유명사를 영어로 똑같이 지저스(JESUS)로 번역하는 것은 오류이며, 그렇게 번역했다고 해서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유명사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해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둘 다 예수로 번역하여 같은 분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이슬람 학자들이지만, 그들의 거짓을 마치 진실처럼 대신 홍보해
주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싸(꾸란의 예수)와 야수아는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첫째 : 이싸는 무슬림이었다고 한다(꾸란2;132, 꾸란3:84).
둘째 : 이싸는 오직 알라만 섬기라고 가르치고 다녔던 무슬림 포교자였다(꾸란5:117).
셋째 : 이싸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꾸란4:157).
넷째 : 이싸는 부활하지 않았다(꾸란4:157).
다섯째 : 이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꾸란19:88-91).
여섯째 : 이싸는 아론의 누이가 낳은 아들이었다(꾸란19:28).
일곱째 : 이싸는 아담처럼 흙으로 만들어 놓고 “되라”고 해서 출생했다(꾸란3:59).

 

무슬림들은 이싸와 야수아가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싸도 처녀의 몸에서 출생했고 이싸도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기적까지 꾸란에 등장하는데 즉 진흙으로 새를 만들어 숨을 불어넣으니 새가 되었다고 한다(꾸란5:110).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이싸가 성경에 많은 기적을 행했던 야수아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꾸란의 이싸가 성경의 야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과 꾸란을 조금만 비교해 봐도 명백하다.

 

성경의 마리아(Mary)와 꾸란의 마리아(Mariyam)

 

꾸란에 나타난 이싸의 동정녀 탄생도 성경의 야수아의 동정녀 탄생과는 매우 다르다. 꾸란 19장은 마리얌(Mariyam)의 장이라고 한다. 성경의 마리아(Mary)와 꾸란의 마리얌(Mariyam)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꾸란의 마리얌은 아론의 누이였다(꾸란19:28). 즉 모세의 친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4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명백한 다른 사건이다.

 

꾸란에는 마리얌이 임신한 몸으로 들판에 나가서 이싸를 출산한 후 안고 마을로 돌아올 때 동네 사람들이 비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또 마리얌이 종려나무를 붙잡고 진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마리얌의 발밑에 흐르는 냇물을 만들어 주었고, 또 대추야자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대추야자를 먹고 기운을 차려 이싸를 출산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 아기 예수를 구유에 뉘었는데 들판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찾아와 경배했다는 성경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생각해 보라. 산고의 진통 중인 여인이 10~15m 되는 대추야자 나무를 어떻게 흔들어서 열매를 떨어뜨리겠는가? 대추야자는 톱으로 열매 둥치를 잘라서 따는 것이다. 물론 2~3m 정도 되는 작은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보통 대추야자 나무는 여인의 몸통보다 더 굵어서 프로 레슬링 선수라도 흔들 수가 없다. 그런데 천사가 흔든 것도 아니고 마리얌이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리고 그 대추야자 열매를 먹고 기운을 차려 출산했다는 것이다.

 

꾸란에는 동네 사람들이 비난하자 마리얌의 품속에 있는 이싸가 입을 열어 자신은 알라의 종이며, 알라가 자신에게 책을 주셨고 자신이 예언자임을 증언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날과 죽는 날 그리고 부활하는 날 자신에게 평화를 주셨으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예배(Salat)와 헌금(Zalat)을 드리라고 말했다고 한다(꾸란19:30-33).

 

예수님은 ‘알라(Allah)의 종’이라고 자신을 지칭한 일이 없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또한 예수님은 책을 받은 일이 없다. 자신이 곧 ‘말씀’이셨기 때문에 따로 경전을 받을 필요가 없으셨다. 신약성경은 후에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예수께서 책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동안 이슬람식 기도 즉 쌀라트(Salat:이슬람식으로 세정을 하고 메카를 향해 꾸란1장을 외우며 절하는 행위)와 자카트(Zakat:소득의 2.5%를 헌금하는 것)를 한 일이 없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인물로 속아주다 보면 전혀 다른 아랍의 신 알라(Allah)를 성경의 여호와와 같은 신으로 착각하여 십계명의 제 1계명을 범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그 기사를 쓴 기자와는 일면식도 없으며 전혀 적대감도 없다. 다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최소한 주요 일간지의 종교 전문가라는 중요한 직책을 이용하여 전국에 있는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일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임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 이만석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Grace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박사(D.Miss).
이슬람권 현지 선교사(86.4~2004.11)
현]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운동 대표,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이슬람대책위원장,
한국교회연합 이슬람대책연구원장
저서] 『무함마드의 계시는 왜 자꾸 바뀔까』 『베일 벗긴 이슬람』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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