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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6·25전쟁과 프레데릭 해리스 목사

“나는 한국이 가장 어두울 때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내 조국의 위대한 챔피언 (champ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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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 

하늘교회 담임
 

올해는 6·25전쟁발발 7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6·25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6·25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끝내야 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목회와 함께 매주 6·25 격전지 탐방과 6·25전쟁을 기억하는 생존자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가 6.25전쟁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6.25전쟁이야말로 하나님이 이 나라를 극적으로 구원하신 교회사이며 또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분들이 피 흘리며 싸운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북한공산군의 기습남침 공격에 의해 시작되었다. 지상군 약 18만 명, 대포 400여 문, 소련제 탱크 242대 등의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4일 만에 대한민국 국군은 절반가량인 44,000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었고 수도서울은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누가 보아도 패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나? 그 배경에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신속한 미군 참전 결심이 있었다. 당시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6·25전쟁에 참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반도를 미국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이 발표된 뒤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자국이 공격받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빨리 미군의 한반도 투입을 결심했다는 것은 기적이다. 김일성 휘하의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전면적 군사공격을 시작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의 비준에 앞서 신속하게 미군을 파병했다.

 

1950년 6월 25일(미국시각),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 휴가차 가 있던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자택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참전을 결심한다. 회고록에는 그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생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과거 민주국가들이 이런 공격을 저지하지 않아 침략자들이 그런 짓을 계속하도록 방치했던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와 인접해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 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비슷한 사건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불렀듯이.” 도대체 무엇이 트루먼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트루먼이 미군파병을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레데릭 해리스 목사라는 한 사람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프레데릭 B. 해리스(Frederick Brown Harris, 1883~1970, 이하 해리스) 목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24년 동안 상원 원목(Senate Chaplain)으로 재직한 관계로 미국정계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트루먼의 신속한 파병결정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보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 그레이엄은 트루먼에게 전보를 보내 “코리아의 남쪽에는 인구대비 세계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들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빌리 그레이엄은 31세의 젊은 목사였고, 전보를 보낼 당시까지도 트루먼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레이엄이 트루먼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50년 7월 14일이었다. 하지만 빌리 그레이엄에 비해 해리스는 트루먼이 부통령이던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다. 6·25전쟁 발발 약 한 달 전 해리스는 트루먼에게 긴급서한을 보내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한국의 이승만을 국빈으로 초청할 것을 요청했다. 해리스는 트루먼으로부터 한국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확인을 받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다.

 

특히 해리스와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는 각별했다. 그가 목회를 담당했던 파운드리 감리교회(Foundry Methodist Church)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출석했던 교인이 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8일 해리스는 트루먼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신속한 파병결정을 치하했다. 해리스는 트루먼의 결정이 “훗날 20세기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다고 회고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당신의 편지에 대해 무척 감사하고 있다”고 회신했다.

 

해리스는 6·25전쟁 기간 중 물심양면으로 한국을 지원하는 일에도 제일 앞장섰다. 1950년 10월 1일 해리스는 그가 담임하고 있는 파운드리 교회에서 전쟁의 폐허 속에 있는 한국을 위해 기도할 것을 제안하였고, 헌금으로 모인 300달러를 한국 정부 앞으로 기부했다. 1951년에도 특별 부활절 헌금 1,550달러를 한국에 전달했다. 이승만 박사는 “이 어려운 시기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해리스는 1951년 10월에도 6·25전쟁 중 서울수복 과정에서 전사한 윌리엄 H. 쇼(William H. Shaw)의 아버지 윌리엄 E. 쇼 선교사를 통해 360달러를 한국에 기부했다. 그 중에서 100달러는 전쟁 중 피해를 입은 한 살배기 아기를 위해 사용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전쟁 중 왼손과 시력을 잃은 그 아기는 부모도 집도 없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1951년과 1953년에는 방한용품을 모아서 파운드리 교회 전 부목사이자 당시 주한미군 군종 목사 랄프 존을 통해 후원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파운드리 교회에서는 약 40여명의 한인들이 김태묵 목사를 중심으로 매 주일 오후에 전쟁 중에 있는 한국을 돕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 모임이 주축이 되어 1951년 10월 14일부터 워싱턴 D.C.지역 최초의 한인교회(The Korean Church)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인종분리 정책이 실시 중이던 미국에서 파운드리 교회가 한인교회 탄생의 보금자리가 된 것이다. 해리스의 한국 사랑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해리스는 전쟁 이후에도 경제원조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미국의 경제원조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모이어(Moyer)가 한국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aid program) 실행에 앞서 해리스에게 먼저 의논한 것은 해리스가 한미관계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영향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으로 워싱턴 D.C.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이 탑승한 비행기에까지 올라 그를 영접한 사람이 해리스 목사였다. 착륙 직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나의 목사님 해리스”라는 표현을 썼다. 이승만 대통령은 방미기간 중이던 8월 1일 파운드리 교회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 예배에는 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노울랜드 의원, 전 주한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도 참석했다. 이승만은 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 해리스와의 오랜 관계를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1945년 이전에 워싱턴 D.C.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나는 이 교회에서 예배를 보았었고, 평생의 친구이자 현재 이 교회를 관할하는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목사를 사귀었다.”

 

 

이승만의 방미 이후 파운드리 교회에서는 해리스 목사의 재임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이때 양유찬 주미대사가 이승만이 보내는 메시지를 대독했다. 이승만은 행사 준비위원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한국이 가장 어두울 때 해리스로부터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내 조국의 위대한 챔피언 (champion)”이라고 해리스를 묘사했다.

 

해리스는 1955년 3월 26일 이승만의 생일을 축하하는 전문을 통해 “훌륭한 기독교인이자 국가원수이며 세계적으로 용맹스런 자유수호자에게 당신의 교회 파운드리가 생일 안부를 전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우리의 교회 파운드리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의 연수는 짧을지라도 여전히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으며,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 독립적인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통일되고 자유롭게 되기까지 쉬지 않을 것 입니다….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맞선 나의 충성스런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여 곧 실현될 것입니다”라는 답신을 보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상황에서도 해리스는 이승만을 “독재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고결한 인격의 자유애호가” 라고 옹호했다. 4월 22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북한의 공산진영이 지금 남한에서 일어난 봉기에 대해 큰 박수를 보내는지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환기시켰다. 이 사실을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지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목하고 두려워하는 존재는 바로 이승만”이라면서 “그들은 모든 노력을 이승만을 잡는 데 보냈으나 그들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이승만)는 한국과 미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해리스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상과 같이 해리스는 파운드리 교회의 담임목사이면서 이승만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을 위한 ‘그림자 대사’(a shadow ambassador)와 같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여,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돕기 위해 피흘리며 싸운 국군과 유엔군을 포함하여,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이 나라의 자유수호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해리스 목사를 추모하며 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던 해리스 목사의 행적을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보게 해 주신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의 김명섭 교수님과 유지윤 박사과정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김재동 목사

서울 하늘교회 담임목사. 성균관대 전자공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부산고신대, 경인여대 외래교수 역임, 현 대한역사문화원 원장, 6.25역사탐방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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