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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과 인천 상륙작전

북한 침략군은 너무 강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3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는 예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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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화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워커라는 인물

낙동강 방어전을 책임 맡을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침범하고 있을 때 요코하마의 일본주둔군 8군사령부에 있었다. 2차 대전 중 가장 격렬한 전쟁꾼의 한 사람이었지만 1949년 9월 일본점령군 지휘관에 취임하여 아들 샘 워커 중위가 미리 와 근무하고 있는 일본에서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현해탄 건너 한반도에 전쟁이 났다. 어쩌면 다시 한 번 거대한 전쟁 소용돌이 속에 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아무 조처를 할 수 없었다.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본국과 부지런히 연락하면서 우선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미 공군을 사용할 수 있도록 워싱턴에 청원을 하고 있었고,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한강변으로 날아가 다리 건너편의 인민군 실태를 파악한 후 미국 지상군을 보내지 않으면 이 전쟁을 막을 길이 없다고 긴급 타전하는 어지러운 행정절차를 밟고 있었다.

 

 

워커가 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대전을 방문한 것은 맥아더 방문 8일 후인 7월 7일이었다. 대전에 와 있던 미24사단장 겸 주한미군사령관인 딘 소장을 대동하고 지프를 타고 전선으로 올라갔다. 미군은 천안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전투에서 연대장과 대대장이 전사하는 참혹한 현장을 봤다. 이 날 유엔안보리는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고 7월 8일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맥아더는 7월 13일 워커를 유엔지상군사령관에 임명하고 대구에 유엔지상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유엔기를 게양케 함으로써 워커는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의 지상 작전사령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의 유엔군사령관 취임을 축하하는 전문은 보냈지만 영국군 등 다른 나라 파견군들이 즉각 이 지역의 작전통제권을 맥아더에게 넘기는 것과는 달리 작전통제권을 넘기지 않고 있다가 7월 14일 개인서한 형식으로 “한 지역에서의 한 사령관 원칙”에 따라 작전통제권을 맥아더에게 넘겼다. 워커는 한반도의 지상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구임지로 날아온 워커는 곧장 정찰기로 대구-대전을 날면서 지형지물을 세밀히 살폈다. 전쟁의 틀을 구상하기 위해서였다. 명확한 문서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찰비행의 결과 ‘전쟁의 최종 방어선은 낙동강’ 이라는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준비가 안 된 방어군에게는 침략군의 무력은 너무 강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3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는 예가 있는가. 적군은 서울을 3일 만에 함락했고 7월 1일 한강다리를 건넌 후에는 죽미령-오산-평택-안성-천안을 무인지경으로 밀고 내려왔다. 한국군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스미스특수임무단, 미24사단 21연대, 34연대가 투입되고 있었지만 인민군의 T34 탱크와 포위전술을 감당하지 못하고 처참한 후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을 대응하려면 병력과 무기가 어느 정도 대등해야 한다. 인민군침략군은 탱크 150대, 122밀리 야포와 자주포, 기계화 부대에 잘 다듬어진 전투력 12만 명을 갖고 밀어대는데 이것을 대응하려면 일본주둔 8군 예하 25사단, 제1기병사단, 24사단, 7사단이 다 동원되어야 할 뿐 아니라 미 본토에서 추가병력이 와야 하고, T34 탱크를 깰 수 있는 3.5인치 대 전차포와 M4A3 셔만전차가 들어와야 한다.

 

워커 장군은 2차 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패튼장군이 이끄는 제3군 20군단장으로 2개 전차사단과 1개 기계화사단, 그리고 유럽전선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제80보병사단 등을 이끌고 유명한 메츠(Metz)포위작전과 발지(Bulge)전투를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었으나 당시 미군과 독일군도 양쪽이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이때 독일군은 공격적 방어작전인 소위 적극적 방어(Active Defence)로 워커군단을 막았으나 미군의 거대한 군수지원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패배했던 것이다.

 

이제 거꾸로 방어자가 된 입장에서는 당시의 나치 독일군처럼 당연히 지연작전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군수지원, 병력지원의 규모가 결국 적을 뒤엎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일단 지연작전을 하면서 방어선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낙동강 7백리가 그런 방어선 지역으로서는 최적이었다. 유럽전쟁 같은 거대한 전쟁을 해 본 사람이 갖는 엄청난 경험적 지혜만이 이런 구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군으로서 6.25전쟁을 가장 성공적으로 치룬 백선엽 장군은 문산 전투에서 인민군에게 패배하고 행주나루터를 건너게 되었을 때 장병을 향해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지리산 게릴라가 되어서라도 싸운다”라고 연설했다. 그는 그렇게 하고 있으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우리를 도울 것으로 믿고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탱크 중위와의 대화

워커의 지연작전 구상을 엿볼 수 있는 전선대화가 있다. 천안전선을 돌아보고 있는 가운데 전선으로 전진하는 전차소대장 중위를 만나 대화했다.

 

워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중위: 확 강타해 쓸어버리겠습니다. (I am going to slug it out with the enemy).

워커: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이자들을 저지만 하면 돼. 진격하거나 마구 공격하거나 한방에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야. 좋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해. 우리가 (무기) 첫 발을 날릴 수 있고 잘 저지 할 수 있으면 돼.

 

인민군은 12만 정규 병력에, 점령한 서울 대전 등지에서 국군포로와 민간인을 무제한 잡아들여 보충병력을 만들면서 양 사방에서 밀고 오기 때문에 절반도 안 되는 우군으로서는 우선 어깨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7백리 낙동강과 험한 산악으로 둘러싸인 낙동강 방어선까지 지연적 후퇴를 할 수 있으면 이기는 전쟁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었다. 지연적 후퇴작전은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독일군은 메츠, 발지전투에서 미군의 공격이 강하면 버티고 좀 약해졌다 싶으면 갑자기 튀어나와 불시공격을 하는 적극적 방어(Active Defence) 작전을 구사했다.

 

한국군은 동쪽으로부터 함창-용기-의성-길안-진안-영덕으로 X라인 방어선을 지키고 미군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Y라인인 상주-낙정왜관-남지-진동을 감당하는 것이다. 적극적 방어전으로 이 라인까지 가야한다. 낙동강 방어선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전 전투선을 적어도 7월 20일까지 지켜내야 한다. 일본 동경에 있는 미1기병사단이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포항에 상륙 예정이어서 그때까지 대전 선을 버텨줘야 한다. 미24사단장 딘 소장은 당초 18일까지 대전을 지킨다는 계획에 따라 사단본부를 영동으로 옮겼다가 20일 다시 대전으로 와 새로 지급된 3.5인치 로켓포로 적 탱크 T34를 직접 쏘면서 대전을 지켰다. 그는 후퇴 길이 너무 늦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결국 포로가 되었다.

 

 

7월 말쯤 전선은 미군의 Y선이 진주-왜관-상주쯤에서 안정되고 한국군의 X선은 용기-군위-의성-길안-영덕 선에서 멈추는 것 같았다. 미25사단, 미1기병사단이 들어왔고 낙동강 전선을 둘러싸고 미공군, 미해군의 공중 및 해상함포 지원이 워낙 강하게 때리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낮에는 인민군이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북한은 전선사령부를 김천으로 옮기면서 대구-부산이 코앞에 왔으니 사력을 다해 공격을 몰아치라고 전군에 김일성 긴급명령을 내렸다. 인민군이 악착같이 밀어붙여 한때 남지-영산이 뚫리고 다부동의 유학산이 점령되고 영천이 점령되는 위기를 맞았다. 진동고개-왜관-다부동-신령-영천-포항으로 방어선이 좁혀 오고 있었다. 대구까지는 불과 20km 안팎이었으며 대구와 마산이 뚫리면 부산까지는 아무런 지형적 장애물이 없어 그냥 넘어갈 판이었다.

 

8월 1일 워커는 유엔지상군 사령관 및 8군사령관의 이름으로 전 전선에 ‘버티든지 아니면 죽어라’(Stand or Die)라는 결연한 작전명을 내렸다. 전선 외곽의 바다에는 2차 대전에서도 볼 수 없었던 거대한 항공모함 3~5척이 집중 배치되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았던 미주리함과 같은 급의 전함 3척, 구축함, 순양함 수백 척이 달라붙어 밤낮으로 16인치, 8인치, 5인치 함포사격과 함재기의 근접 지원사격을 했다. 일본기지에서 날아온 제5,13공군의 전투기, 폭격기 1천5백 대가 500파운드, 1000파운드짜리 폭탄, 기관총,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버티든지 죽든지, Stand or Die

낙동강 서안의 남지, 낙동리, 왜관은 인민군이 밤에는 강을 넘고 낮에는 다시 후퇴하기를 거듭하고 다부동, 신령, 영천, 안강, 포항지구에도 고지의 주인이 밤낮으로 바뀌면서 강과 산은 적군과 아군의 시체와 피로 덮여갔다. 이때는 아직 야광조명탄의 수명시간이 짧아 해군 및 공군이 야간폭격, 포격을 할 수 없었다.

 

8월 한 달과 9월 전반기 내내 2차 대전 전체를 통해 퍼부은 폭탄의 양과 맞먹는 포격과 폭격이 온 낙동강 전선에 쏟아졌다. 워커는 정찰기를 타고 지상에 붙을 정도의 저고도 비행을 하면서 마이크로폰으로 지상에 공격방향을 지시하고 필요한 작전명령을 문서 전달통에 넣어 던지고 다녔다. 뒷날 유엔군사령관이 된 마이크 마이켈리스의 미27연대를 긴급 소방팀으로 쓴 것은 워커의 낙동강 작전의 위업이었다. 미27연대는 완전 편성된 3개 대대, 105mm 포병대대, 1개 전차중대, 155mm포 1개 중대에 무제한 탄약을 쓸 수 있는 보급체제를 갖춘 어마어마한 화력과 병력으로 낙동강 전선이 뚫리는 지점을 찾아가 위기를 틀어막는 역할을 했다. 서울 점령 사단인 인민군4사단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있던 남지-영산지역에 투입되어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대구점령의 문 앞 통로인 다부동전투를 지원해 국군1사단을 승리하게 하였고, 다시 마산 입구의 진동고개에서 인민군6사단을 파괴해 인민군의 마산-밀양 진격을 저지한 경이로운 공적을 세웠다.

 

9월 10일 맥아더는 아직도 흔들거리고 있는 낙동강 전선에서 미 제1해 병사단과 국군해병대, 국군17연대를 빼내고 일본에 있던 미7사단을 합쳐 인천상륙작전에 동원했다. 전선이 약해지는 듯 했다. 이 틈을 탄 인민군은 죽음의 낙동강 방어선 뚫기를 했다. 다부동, 영천이 다시 뚫리고 낙동강 전선이 흔들리는 듯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9월 15일 이후에도 인민군의 낙동강 전선 공격은 한때 계속되었다.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하여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사실을 인민군 지휘부가 예하부대에 숨겼기 때문이었다.

 

워커의 별이 번쩍번쩍 빛난 전투였다. 이승만은 워커를 알고 있었다. 이승만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던 무초 미국대사는 이승만의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날이면 워커를 데리고와 이승만대통령을 보게 하였다. 이승만은 불독같이 생긴 워커를 보면 늘 기분이 풀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인천상륙작전 >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성공전략이었는데도 당시는 물론 지금도 큰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당시 이 전략이 거의 아무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순전히 맥아더 혼자의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었고, 둘째는 상륙작전에 이어 벌어진 후속 전략이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에서 6월 29일 한강변에 서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강력하고 거대한 침략군을 때려잡기 위해서는 적을 한반도 끝자락으로 깊숙이 끌어들인 후 어디엔가에 상륙을 해 적의 허리를 끊어버리고 침략군을 독안에 든 쥐 모양으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필리핀을 회복한 전략이 바로 후방차단 상륙작전이었다.

 

1944년 11월 그가 필리핀 탈환전을 시작했을 때 마침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주도했던 일본 해군연합함대사령부가 민다나오섬에 이동해 와 있었다. 호주의 극동사령부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맥아더군이 민다나오 섬을 1차 공격목표로 삼는 것이 당연해 보였으나 항공폭격만 하고 그냥 지나쳤다. 상륙부대는 민다나오 뒤쪽 레이테(Leyte)섬을 공격했다. 레이테는 일본군 세력이 비교적 적게 깔린 곳이었고, 레이테를 잡으면 곧 바로 마닐라가 있는 루존섬을 공격하는 근접 거점이 될 수 있었다. 그 의 레이테섬 상륙 성공은 태평양전쟁의 큰 진전이었으며 개인적으로는 1942년 2월 마닐라 앞 코리기도섬을 탈출하면서 “나는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라는 약속을 성취한 놀라운 업적이 되었다.

 

 

맥아더가 한강을 시찰하고 돌아오면서 구상했다는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비밀리에 이 지역의 파도 높이와 상륙지점 점검 등 세밀한 준비를 한 후 7월 23일 미합참에 상륙작전 허가를 요청했다. 합참은 부정적이었다. 특히 해군이 ‘반역적인 인천항의 해안환경’ 때문에 극력 반대했다. 간만의 차이가 10미터가 넘고 주변이 모두 갯벌 천지인데 여기서 조금만 삐걱거리면 상륙선은 해안포의 밥이 된다는 것이었다. 합참은 코린스 육군총장, 포레스트 셔만 해군총장 등을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로 보내 상륙작전을 만류하도록 했다. 셔만 해군총장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은 5,000분의 1이라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원수 계급장을 걸고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겠다고 주장했다. 5,000분의 1이라고 믿어지는 그 환경 때문에 완벽한 기습공격이 될 수 있으며 만일 초기에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공격을 멈추고 그대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맥아더의 계획은 강행되었으며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맥아더는 승리했으나 반대자들은 그 승리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크게 환영하는 기색이 없었다. 상륙작전이 또한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소수의 종군기자들이 동참했으나 당시 통신사정이 나빠 신속한 보도를 하기도 어려웠다. 맥아더는 세계전투사상 거의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는데도 세계가 조용해 불만스러워 했다. 아마도 그가 후일 원산상륙작전(1950.10.14.)을 강행한 것이 이런 불만을 엎고 다시 한 번 세계적 환영을 받으려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인천 상륙이 성공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미 국무성은 수복된 수도 서울을 당장 한국에 돌려주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28일 부산의 이승만 대통령을 김포공항으로 오게 한 후 마포에 부교를 설치하여 먼저 이승만 대통령의 차가 건너게 하고 아직 포연 냄새가 가득한 중앙청에서 수도 서울 이양식을 거행했다. 과거 필리핀 탈환 시에 했던 그대로를 강행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환도식은 맥아더의 웅대한 전략과 배짱이 없으면 이뤄질 수 없는 업적이었다. 비록 그가 38선을 넘어 통일의 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긴 했지만.

 

* 정일화 박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미국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정치학 박사)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논설위원 겸 통일문제연구소장, 한미안보연구소 이사 저서로는 <맥아더의 한국전쟁>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하우스만 대위> ,<휴전회담과 이승만> ,<아는 것과 다른 미국> ,<대한민국 독립의 문 카이로선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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