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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6.25 전쟁의 배경

- 6·25 전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산물이다
- 6·25 전쟁은 중․소 지원 약속으로 김일성이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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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역사적 팩트

6.25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70년이 되었다. 전쟁 중에 태어난 2세대가 올해 70세가 되었고, 전후 3세대, 4세대가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을 적화통일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이 소련 탱크 242대를 앞세워 불법으로 남침하여 3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르고 수많은 사람을 죽게한 민족상쟁의 비극이 바로 6.25전쟁이다. 국군 62만 명이 전사, 부상, 포로 등으로 희생되었고, 민간인도 99만 970명이 희생되었다.

 

전방부대 군인 1/3을 휴가나 외출 보내고, 전투장비도 후방으로 정비 보내는 등 전투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인 남침을 받았으므로 남침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 달 만에 국토의 90%를 빼앗겼다. 8월 1일 국군은 낙동강까지 철수함으로서 남은 것은 대구와 부산뿐이었다. 낙동강을 방어하지 못하면 나라를 잃고 패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전쟁 초기 미군의 참전도 허사였다. 탱크도 없이 선발대로 들어온 스미스부대가 7월 5일 오산 죽미령전투에서 패한 이후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계속 수세에 몰려 7월 20일 대전을 빼앗기고 대구 근방 왜관까지 밀려 내려갔다.

 

 

국군과 유엔군은 대구와 부산을 지키기 위해 왜관-의성-포항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철통같은 방어에 들어갔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방어하고 있는 동안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했고 마침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하게 되었다.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도망했다.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고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으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다. 10월 26일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3년 동안 전쟁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전쟁에 개입하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는 증거를 수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기적’,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부른다.

 

1. 6·25한국전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산물이다

6.25전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세계 공산주의 운동부터 이해해야 한다. 1848년 독일의 반체제 사상가 칼 마르크스(Karl H. Marx: 1818~1883)의『자본론』이 출판된 이후 공산주의 사상과 운동은 유럽을 휩쓸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 후진국가로 퍼져 나갔다. 유럽 자본주의에 불만이 많았던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가난한 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임금을 착취했기 때문이라고 선전하고, 노동계급의 단결과 폭력혁명을 통해서 정권을 탈취, 생산수단의 공유와 이익의 균등배분을 통하여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면 노동자 농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선전했다.

 

이에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던 레닌(Vladimir I. Lenin: 1870~1924)은 마르크스 이론에 철저히 매료되었으며, 그의 혁명이론을 받아들여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소련)’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 1917년 전쟁과 가난이라는 고통에 휩싸였던 러시아에서 레닌의 선동은 먹혀 들어갔다. 혁명의 선봉에선 레닌은 노동자들을 결속시키는데 성공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쉽게 달성됐다. 혁명의 물결은 공산주의 신봉자들에 의해 세계로 퍼져 나갔고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자 그의 후계자가 된 스탈린은 1929년 공산당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대외적 영향력 확대와 영토 확장에 나서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발트3국, 핀란드, 루마니아를 차례로 침략했으며 동독, 체코, 유고, 헝가리,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동유럽 대부분과 북한까지 소련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이제 스탈린의 야심은 김일성을 앞세워서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운명은 스탈린의 손에 달려있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세계 공산화전략은 혁명이론가인 마르크스와 혁명실천가인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합작품으로 스탈린에 의해 세계화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가난과 고통의 늪에 빠져있던 후진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했다. 노동자들이 단결만하면 가난에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는 매력을 갖게 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선전에 불과하지만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꿈이다. 1921년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은 레닌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자신의 철학에 확신을 갖 고 반정부 투쟁에 들어갔다. 28년 만에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를 중국 대륙에서 내쫓고 1949년 10월 1일 중국을 통일하였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은 러시아 혁명과 중국의 공산통일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반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6.25전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2. 중․소의 전쟁지원 약속과 김일성의 자신감

가짜 김일성의 등장과 집권

한일합방(1910) 이후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하고 있던 시절 1940년 만주에서 잠시 독립군 행세를 하던 김성주(金聖柱)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일본군의 만주토벌을 피해 1940년 12월 소련으로도망했다. 그때 김성주의 나이는 28세였다. 따르던 무리와 함께 갔는데 그중에는 김정일(金正日)의 어머니 김정숙도 있었다.

 

이때 소련은 극동지역에서 일본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일본을 견제하고 있던 때라 소련으로 도망해온 항일 독립군 청년들을 환대했으며 그들을 일본의 스파이로 키우기 위해 소련군 88여단 소속으로 특별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과 정보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88여단에는 30여 명의 한인청년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고려인 출신을 기용했다. 유성철(兪成哲)이 대표적 인물로 군사 교관 겸 김성주의 통역관 역할도 맡았다. 유성철은 김성주가 북한으로 입국할 때 동행했으며 인민군 창설을 주도했고 인민군 중장으로 특채되어 남침계획을 준비한 핵심인물이 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에 참전했다. 단 7일 동안 참전했지만 소련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승국이 되어 북한에 상륙하게 된다. 8월 8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북한 땅에 상륙한 소련군은 8월 24일 평양을 점령했으며, 북한을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소련에서 혁명사상을 교육받은 김성주(소련군 정보장교, 대위)를 귀국시켰다.

 

9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원산을 통해 입국한 김성주는 소련군 보호 아래 은둔 생활하다가 10월 14일 평양 시민환영대회에 첫 모습을 나타냈다. 청중들 앞에 나타난 김성주는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으로 소개되었다. 한 순간에 갑자기 영웅이 된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33세였으니 시민들은 곧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소련군 독재 치하여서 북한 주민들은 꼼작도 못했다. 가짜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 아래 북조선 공산당을 조직하고 모든 권력을 독점한 채 괴뢰정부 수립에 들어갔다.

 

 

특이한 점은 정부수립보다 먼저 인민군을 창설(1948.2.8.)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처음부터 남침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나 남침을 원했으면 군을 먼저 창설했겠는가! 또한 미군보다 먼저 북한 땅에 진군한 소련군은 남쪽까지 밀고 내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38선에서 멈추었다. 소련은 이때부터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오만과 자신감

김일성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남침하기 전 3차례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허락과 지원약속을 받았고 1950년 5월 15일 중공의 마오쩌둥으로부터 참전약속과 모든 전쟁물자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한국군은 탱크 한 대도 없는데 북한군은 소련으로부터 탱크 242대, 전투기 폭격기 등 항공기 211대, 고사포. 박격포 등 각종포 3,500 문을 확보했다. 인민군은 중공군 소속이던 만주군(조선족 출신)의 3개 사단(증강된 병력 6만 명)을 지원받아 총 10개 사단, 탱크여단, 포병, 공병여단 등 총 20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남침준비를 완료했다. 당시 한국은 8개 사단 규모의 10만 명으로 북한군이 병력은 2배, 화력은 4배, 탱크는 200배가 넘는 규모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침 공격만 하면 백전백승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남쪽에 심어놓은 고정간첩으로부터 남침만 하면 바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보고를 계속 받음으로 김일성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3일이면 충분히 서울을 점령하고 남조선을 해방시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작전명령도 3일 동안에 끝내는 계획만 갖고 있었다. 소련의 공개된 비밀문서에 의하면 ‘한강을 넘지 말라’는 스탈린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만 점령하면 인민봉기가 일어나 남조선을 통일할 수 있다고 수차례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작전계획도 서울 점령까지만 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인민봉기를 호언장담한 남로당 박헌영은 휴전 후(1955.12.15) 미제 스파이 반당종파분자라는 죄명으로 숙청당했다.

 

3. 해방이후 극도로 문란한 남한의 혼란정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국내정세는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요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던 애국자들이 속속 귀국함에 따라 정치를 하겠다는 정치꾼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한때는 군소정당이 100여 개가 넘었으며 서로 난립하는 바람에 정국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남로당은 여기저기서 반정부 폭동을 일으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이었다. 다행히도 이승만이 난국을 수습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남로당은 국회, 정부, 군 내부에까지 고정간첩을 침투시켜 북한과 내통하면서 국가전복 내지 남침을 유도하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1949년 8월 남로당과 연계된 국회의원 13명이 반정부활동을 하여 유죄가 선고되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남로당의 제2인자인 김삼용과 이주하가 간첩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6.25가 발발하자 남산에서 처형되었다.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익분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국민보도연맹¹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다. 1949년 10월부터 연말까지 전향한 좌익분자는 무려 30만 명이나 되었다. 이승만정부가 이들을 자유시민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과거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자수의 기회를 주고 ‘보도연맹’ 단체에 회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자유시민권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박헌영이 남한에 20만 명 남로당원이 있다고 김일성에게 보고한 것도 보도연맹에 가입한 숫자를 보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향하지 않은 자를 최소 10%만 잡아도 3만 명은 더 있었을 것이다. 이들 중에 북과 내통하고 남침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 군에 심어놓은 고정간첩의 활동은 6.25 남침을 결정적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4. 군 내부의 고정간첩, 남침의 길잡이

참모총장 부관 라엄광 중위는 고정간첩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날부터 국군이 패할 수밖에 없는 징조가 여러 가지 나타났다. 당시 2주 전부터 전방부대가 비상경계상태에 있었는데 이를 해제하는 전문이 내려왔고, 또 전 부대에 외출·외박을 실시하라는 전문도 육군본부로부터 내려왔다. 주말에 장병의 1/3을 외출·외박으로 내보내서 부대는 텅 비어있었다. 누가 이런 전문을 내려 보냈을까? 휴전 후에 근거를 찾으려고 했지만 기록상 발신자와 부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유령(간첩)이 비밀리에 내려 보냈을 것이다. 또 전투장비 중 기관총, 박격포, 병력수송 차량 등도 6월에 들어서 정비 명목으로 후방부대 기지창에 수리를 맡겼으니 전투가 불가한 상태였다.

 

그뿐 아니라 대령급 이상 장교들은 6월 24일 오후 5시 육군본부 장교구락부 준공식 파티에 초대되어 대부분 삼각지 육군본부에 집결해 있었으며 음주로 인하여 부대 출근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런 기막힌 일들이 전쟁을 포기한 부대처럼 전야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육군본부의 파티는 밤 9시쯤 끝났으나 2차를 유도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장성들을 국일관으로 인도하여 밤새도록 음주가무에 취하게 하였다. 계획적으로 전투대비 태세를 방해한 것이다. 새벽에 전쟁소식을 들었으니 취한 상태에서 부대 지휘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만든 사람은 과연 누구였는가? 당시 연합신문 주필이던 정국은(鄭國殷)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휴전 이후 간첩죄로 사형당했다.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남쪽 군 내부에 심어놓은 고위급 고정간첩들에 의해 전략적이고 계획적으로 준비되었던 것이다. 북한은 기습 남침일을 6월 25일 새벽으로 정해 놓고 D-10일부터 착착 진행하고 있었는데 남한은 무방비 상태였다. 물론 당시 육군본부 정보처에서는 남침 징후가 보이니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몇 차례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바 있다. 그럴 때마다 참모총장은 이를 무시했고, 국회에 나가서는 의원들의 질문에 북한은 남침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남침한다면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개성에서, 저녁은 평양에서 먹게 될 것”이라는 허황된 말로 답변하는 쇼를 하였다. 이처럼 전쟁 대비태세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6.25남침을 맞이한 것이다.

 

한편 라엄광 중위를 북한의 첩자로 지목하는 이유는 장교는 누구나 병적기록부가 있고 군적에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라중위는 군적에 없었다. 더욱 의심받는 것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군인이라면 육군본부가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다니며 참모총장을 보필해야 하는데. 아마 북한으로 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국내 좌익분자들은 곳곳에 숨어서 북한과 내통하며 북한의 남침전략에 기여했다. 휴전 이후에 더 많은 고정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정보당국의 이야기이다. 적화통일에 실패한 북한이 끊임없이 남한을 괴롭히고 있는 대남전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핵으로 무장하여 군사적 우위를 자랑하고 있는 지금 북한의 대남전략은 과거보다 더욱 강화되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국민들이 정신차려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북한을 바로 보고, 바로 알자. 북한 독재권력과 북한주민을 혼동하지 말자. 북한주민을 위한다는 미명의 온정과 지원은 곧 독재정권의 강화와 대남 적화통일의 기회를 앞당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배영복(裵永福)

육군정훈감을 역임한 (예)준장(ROTC 3기) 6.25 진실알리기운동본부 이사. (현재) 도곡현대사연구소 대표,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KVMCF) 회장, 베트남선교협회 회장, 연동교회 장로

(저서) 전쟁과 역사(2014) /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2017)

 

 

국민보도연맹¹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6월 5일에 조직했던 대한민국 반공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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