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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칼럼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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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목사 | 무슬림선교훈련원장

 

이슬람을 연구하다보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히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이슬람에는 타끼야(Taqiya)라는 편리한 교리가 있어서 뻔뻔스럽게 거짓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마저 거짓이었다니?”라고 놀라게 된다.


특히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대해서 연구를 하다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통해서 꾸란의 허구를 밝히고자 한다.

 

꾸란에 대한 주장


이슬람학자들의 꾸란에 대한 주장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은말을 한다.
*첫째 : 꾸란은 하늘에 원본이 있는 책이다. (꾸란 13:39)
*둘째 : 꾸란은 무함마드에게 내려 보냈으며 오류가 없다. (꾸란 18:1)
*셋째 : 계시된 꾸란은 알라께서 보호하신다. (꾸란 15:9)

 

이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거짓된 주장을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그 주장의 오류를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슬람에서는 꾸란을 검증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형법으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이슬람학자들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창조주가 주신 권리를 누리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조하신 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그들에게 동산의 모든 관리권을 넘겨주신 후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유일한 계명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계명을 범했을 때도 당장 죽이지 않으시고 동산에서 추방하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에 1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자동으로 기절시킨다든지 감히 접근할 생각을 못하도록 창조하실 수도 있었으나,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즐거운 마음으로 준수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천부의 인권인 표현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꾸란의 형성사(史)


먼저 꾸란이라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슬람학자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후 570년, 무함마드라는 사람이 압둘라의 아들로 메카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610년에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첫 계시를 받았는데, 그는 글을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 계시된 구절들을 외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외워서 나뭇잎나 짐승의 가죽이나 얇은 돌 등에 기록하여 두었다.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가 우상숭배를 반대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중심지인 메카 사람들로부터 핍박이 심해지자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주후 622년 메디나(당시 이름은 야스립)로 피신하였다.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18개월 만에 서로 다투고 있던 메디나의 여러 부족들을 연합하고 최고 통치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꾸란의 구절들을 계시 받았는데 이런 구절들은 무함마드의 많은 추종자들이 외웠고 혹은 기록해 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었을 당시에는 아무도 꾸란을 책으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란을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Sahih al
Bukhari V6 Number509)


무함마드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배신하고 떠나려고 했다. 그 때 제 1대 칼리프(무함마드를 계승한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가 된 아부 바크르가 배교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배교의 전쟁(Ridda Wars)이라고 하는데, 이 전쟁들 중 야마마(Yamama) 전투에서 꾸란 전체를 암송하던 70명의 하피즈(Hafiz: 꾸란을 모두 암송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자 우마르는 꾸란을 외우던 자들이 전쟁에서 다 죽기 전에 이것을 모아 책으로 만들자고 제안했고 아부바크르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아부 바크르가 자이드 이븐 타비트(Zaid Ibn Thabit)에게 명령하여 꾸란 구절들을 모아서 무함마드의 아내 하프사(Hafsa)에게 보관시켜 놨었다. 그러나 두 번째 칼리프였던 우마르는 영토 확장 전쟁에 집중하느라 꾸란을 집대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칼리프였던 우스만 때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점령하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을 맡은 후자이파(Hudhaifa bin al Yaman)장군은 이라크 무슬림들과 샴(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 무슬림들을 모아 연합군을 만들어 함께 공격하고자 했다. 그는 이 두 군대의 정신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꾸란의 구절을 외우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이 외우던 꾸란 구절이 서로 달라서 오히려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칼리프 우스만에게 “유대인들처럼 우리에게도 통일된 한 권의 경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우스만은 자이드 이븐 타비트에게 명하여 하프사가 보관하고 있는 꾸란을 가져오고 또한 더 많은 꾸란 구절들을 수집하라고 명했다. 자이드가 꾸란 구절들을 다 수집했다고 보고하자 우스만은 꾸라이시 종족 3명을 불러 “이 꾸란은 원래 무함마드가 꾸라이시 방언으로 계시를 받은 것이니 너희가 수정해서 완성본을 만들라”고 했다. 우스만은 수정을 마친 꾸란 구절들을 책으로 만들었고 다른 모든 사본들은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다섯 개의 사본을 만들어서 그 당시 이슬람이 통치하던 주지사들에게 보내며 명령하였다. “꾸란은 이것만 사용하고 이와 다른 모든 꾸란은 그것이 몇 구절뿐이든지 아니면 전체를 묶어 놓은 꾸란이든지 발견하는 대로 불태워버려라.” 그 결과 지금의 통일된 꾸란이 보존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슬람의 가장 권위 있는 무함마드의 언행록 수집자인 부카리의 하디스(Sahih al Bukhari)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이슬람학자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꾸란에 대한 이러한 기록과 주장들이 과연 사실인지 이제부터 검증을 해보자.

 

아랍 문자가 생기기도 전에 완성된 아랍어 꾸란?


먼저 아랍어 알파벳의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 학자들은 “꾸란은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고, 하늘에 원본이 있는 책으로,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기 때문에 주후 610~632년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랍어 글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알면 놀랄 것이다.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주전 20세기에 살았던 이스마엘이 아랍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황당한 말인지 모른다.

 

아랍어에는 아(Fatha) 우(Damma) 이(Casra)의 3가지 단모음이 있는데, 똑같은 글자에도 이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뜻이 전혀 달라진다.아랍어에 단모음을 붙이는 것을 개발하여 문법을 만든 사람은 아부 알 아스와드 알 두알리(Abu al-Aswad Al-Duali)이다. 그런데 그는 주후 603년에 태어나서 689년에 죽은 사람이다. 즉 무함마드가 죽은 후 반 세기가 지나서야 아랍어에 모음 표기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우스만이 꾸란의 완성본을 만들었다는 때가 주후 651년인데, 그 때는 아랍어에 모음 표기하는 방법이 없었을 때이다.

 

(* 1 일반적으로 신문이나 서적에는 모음부호의 표기를 생략하기도 한다.)


아랍어 알파벳에 대해서 더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아랍어는 자음에 점을 붙임으로 발음이 달라진다. 똑같은 형태의 글자에 점 하나를 위에 붙이면 N자가 되고, 점 두 개를 위에 붙이면 T자가 되고, 점 세 개를 위에 붙이면 Th자가 되고, 같은 모양에 점 하나를 밑에 붙이면 B자가 되고, 점 두 개를 밑에 붙이면 I자가 된다. 이 점 붙이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나스르 이븐 아심 알레이티(Nasr bin Asim Al-Leithi)라는 사람인데, 그는 주후 708년에 죽었다. 무함마드가 632년에 죽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놀랄만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무함마드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아랍어 알파벳의 자음과 모음을 정확하게 표기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랍어로 된 꾸란의 원판은 하늘에 있다고 하는데(꾸란 85:22), 알레이티가 아랍어 알파벳에 점찍는 방법을 개발했을 때 하늘의 아랍어 원판에도 천사들이 점을 찍었을까?


아랍지역의 어느 박물관을 가보아도 이슬람 발생(주전622년) 이전에 아랍어를 썼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아무도 이를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인류는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속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북부에서는 주전 2세기부터 주후 4세기까지는 나바티안(Nabataean Alphabet) 글자를 사용했고,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는 주전 2세기부터 주후 6세기 까지 히미여르(Himyarite) 글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중동의 여러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슬람 발생(주후 622년) 이전에 아라비아 반도 중부에서 사용되었다는 글자는 찾을 수 없었다.

 

아랍어 알파벳이 8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7세기에 아랍어로 꾸란의 완성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꾸란 최초의 사본들은 어디에?


부카리의 하디스에 기록된 내용들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우스만의 꾸란 최종본이 651년에 만들어졌고 다섯 개의 복사본을 만들어 그 당시 이슬람이 통치하던 다섯 개의 지역에 보내졌다고 한다면 그 사본들은 지금 잘 보관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슬람이 통치하던 메카, 메디나, 바스라, 바그다드, 쿠파 등지는 그 때 이후로 비무슬림들에게 점령당한 역사가 없었고,보관된 문화재를 파괴할 정도로 야만적인 통치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상에는 우스만의 꾸란 사본이 한 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우즈베키스탄에 보관되어 있는 사마르칸트 사본이 우스만의 사본이라고 주장하지만, 학문적으로 검증해 보면 탄소연대 측정 결과 사마르칸트 사본은 주후 651년에 완성했다고 주장하는 우스만 사본보다 훨씬 이후인 주후 755~995년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뿐 아니라 우스만의 꾸란은 꾸라이시 종족이 사용하던 히자즈 아랍어로 기록되었지만 사마르칸트 사본은 쿠픽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 학자들은 주장에 의하면 우스만이 다섯 개의 지역에 보냈던 꾸란 사본들 중에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는 것들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에 보관되어 있는 사마르칸트 사본, 이스탄불에 보관된 톱카프 사본, 이집트의 카이로에 보관되어 있는 후세이니 사본, 영국 런던에 보관된 마일 사본, 프랑스의 페트로폴리타누스 사본, 그리고 예멘에 보관되어 있는 사나 사본 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서로 내용이 같지 않으며, 또한 현재 무슬림들이 사용하고 있는 꾸란과도 그 내용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어떤 무슬림 학자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꾸란은 무함마드 사후 21년만에 우스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훨씬 후대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계속 수정 보완 편집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다.


우스만 꾸란의 형성과정에 대한 부카리 하디스의 기록은 검증되지 않은 하나의 주장일 뿐이며, 검증하면 할수록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뿐이다.


아랍어 꾸란이 31가지라니?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비판하듯이 꾸란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여러 비무슬림 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현재 지구상에서 무슬림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랍어 꾸란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31가지 서로 다른 아랍어 꾸란이 있으며 계속 추가로 발견 중이라는 것이다. 유투브에서 “Thirty-One Different Qurans!”를 검색해 보면 전문가들의 자세한 설명을 영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영상은 이슬람의 비판적 전문가 제이 스미스(Dr. Jay Smith)와 아랍인과의 대화로 31가지 서로 다른 아랍어 꾸란에 대해 많은 자료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슬람학자들과 이미 여러 차례 공개토론을 했는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분명한 증거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혀 두려움이 없다. 만일 그의 주장에 의심이 간다면 이의를 제기하고 정정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부카리의 하디스에 나오는 꾸란 형성사(史)를 사실로 알았지만, 그것마저 타끼야(거짓)였다니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이슬람에 대해서 눈을 뜰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은 꾸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 그 율법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세상을 샤리아(이슬람율법)로 통치하려고 한다. 그 꾸란이 뿌리부터 흔들거리고 있다. 꾸란에 대한 무슬림들의 환상과 허구가 벗겨지고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요8:32). 무슬림들이 진리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이만석 목사 약력 :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에서 선교문학석사(MA)와 선교학석사(Th.M), 미국 Grace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박사(D.Miss)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이슬람권현지 선교사(86.4~2004.11)로 활동하였고, 현재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운동 대표,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이슬람대책위원장, 한국교회연합 이슬람대책연구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무함마드의 계시는 왜 자꾸 바뀔까> <베일 벗긴 이슬람>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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