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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북한 정치범수용소와 국제사회 대응

정치범 수용소가 폐쇄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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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 혜 미국변호사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싱가포르, 하노이에 이어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나는 깜짝 쇼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정상의 만남의 핵심적 과제인 북한의 핵문제나 인권 문제에 대한 실질적 성과나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초기 탈북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하는 등 북한 인권에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만큼은 북한인권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는 큰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친김정은적 행보에 탈북자와 북한인권운동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조차 점점 실망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북한의 인권문제 해결의 열쇠를 꼭 미국 대통령이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가? 하는 의문과 반성이 든다.

 

무엇보다, 지난 수십 년간 북한인권 문제, 특히 정치범수용소 문제에 대해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국제사회와 일반대중들은 꾸준히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과 북한인권운동가들, 그리고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철폐”를 외치고 있다.

 

우선,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노력에 대한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북한정권이 정치범수용소와 같은 집단수용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이다. 당시에는 지주, 친일파, 종교인들을 수용하였고, 황장엽씨의 증언에 따르면 1958년 평남 북창군 소재 탄광지역에 ‘통제구역’ 이라는 것이 최초로 설치·운영되기 시작했다. 북한정권의 아주 초기부터 운영되었던 정치범수용소가 국제사회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1988년 아시아감시위원회(Asia Watch)와 미네소타 변호사 국제인권위원회가 공동 조사한 북한인권보고서에 “북한에는 특별독재대상구역이 12개가 존재하며 약 15만 명이 수감되어 있다”고 밝힘으로써이다.1

 

그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992년 북한의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서 풀려나 한국으로 넘어온 강철환과 안혁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가 명확해졌다. 정치범수용소 생존자 강철환과 안혁의 증언을 토대로 1994년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북한 정치범에 관한 특별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후 1994년 함경북도 회령 수용소의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안명철씨와 1999년 최초로 완전통제 구역을 탈출한 김용씨의 증언으로 북한정치범수용소의 존재와 그 안에서의 인권실태 등이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매년 발간하는 북한인권실태보고서와 유엔인권이사회에서 결의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비롯하여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발표하는 북한인권실태보고서에서 정치범수용소는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유럽이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자국민 납치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 또한 어느 나라보다 북한인권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오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발의하는 국가는 공교롭게도 한국이 아닌, 유럽연합과 일본 두 나라이다.

 

또한, 2001년 미국에서 설립된 북한인권위원회(The Committee for Human Rights in North Korea, HRNK)는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외교 및 인권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 국제사회에 북한인권실태를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데이비드 호크(David Hawk)는 북한인권위원회의 조사관으로 선임되어 특별히 정치범수용소에 큰 관심을 갖고, 2003년 『감춰진 수용소』라는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그 보고서는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 뿐 아니라 위성사진을 통해 수용소의 정확한 위치를 공개함으로써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최초의 가장 설득력 있고 신뢰할 만한 보고서로 인정받았다.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발간하거나 또는 유엔과 세계 각국에서의 생존자들의 증언 및 기자회견으로 제한적이었던 정치범수용소 문제가 큰 전향점을 이룬 것은 2011년도이다. 2011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시작된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 운동”은 북한 정치범수용소 철폐를 위한 국제 캠페인의 가장 성공적 사례일 것이다. 고인이 된 신숙자씨와 그녀의 두 딸 오혜원, 오규원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 요덕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수감된 것으로 요덕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리고 지저스아미 수련회에 참석했던 통영의 방수열 목사님 부부가 그 이야기를 듣고 통영에서 ‘북한정치범수용소 사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신숙자 모녀 이야기가 통영 전역에 알려졌고, 신숙자씨를 알던 이웃들과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캠페인을 시작했다. 내 친구가, 내 이웃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1년도 되지 않아 국제 캠페인으로 확장되었다. 여러 국제인권단체들이 유엔 내 임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에 신숙자씨와 두 딸 오혜원, 오규원의 생사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서를 보냈고, 유엔은 공식적으로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에 전달하여 답변을 요구했다. 지금까지 유엔을 통해 북한당국에 생사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서가 많이 전해졌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 답변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례적으로 2012년 북한은 서한을 보내 신숙자씨의 사망을 확인해 주는 성과를 얻었다.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유럽, 일본 등의 꾸준한 북한인권 문제제기와 관심은 2013년 유엔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COI) 설치를 담은 결의안 통과라는 큰 결실로 이어졌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설치는 그간 구속력 없이 권고 수준에만 머물렀던 북한인권결의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였다. 다시 말해, 그간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인권실태를 알리는 방향에서 가해자들을 규명함으로써 형사처벌의 가능성을 여는 적극적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실제로,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던 수단 다르푸르, 시리아, 리비아, 레바논, 동티모르, 코트디부아르 중 수단 다르푸르와 리비아 사건은 국제형사 재판소에 회부되는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2

 

2014년 2월 17일,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식량권 유린과 정치범수용소와 관련한 전반적인 인권 침해, 고문과 비인도적 처우, 임의적 체포와 구금, 기본적인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에 대한 조직적인 거부와 침해 등의 차별, 표현의 자유 침해, 생명권 침해, 이동의 자유 침해, 강제 실종 등 모두 9개 분야에 대한 세밀하고도 방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3 무엇보다 이 보고서에는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형사재판소나 유엔이 임시로 설치한 재판소에 북한 인권유린 상황을 회부할 것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더불어, 조사위원회는 북한의 반인도 범죄 책임자들에 대한 추가 제제를 유엔에 권고했다.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조사위원회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이다. 그 서한에는 북한의 반인도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유엔에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할 것을 권고할 예정이며, 반인도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들 중 김정은 제1위원장도 포함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4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의 주요 권고사항5

 

 

인권과 같은 인류 보편의 문제에 대해 국내문제불간섭원칙(Non intervention)이 적용되지 않는 것과 이 문제에 북한정권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유엔과 국제사회가 천명한 것이다. 최근의 북한과의 평화적 분위기 속에서도 다행히 유엔인권이사회와 유엔총회는 계속해서 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의 인권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라고 촉구해 오고 있다.

 

인권과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 상·하원에서도 특별히 북한 정치범수용소 철폐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매년 상정되고 있다. 올 초에도 마이크 코너웨이 공화당 하원의원과 제럴드 코놀리 민주당 하원의원이 공동으로 북한수용소 전면철폐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하여6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문제 앞에 정당과 이념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국내에서는 정권이 바뀐 후, 남북평화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북한인권단체들의 목소리와 활동이 제지당하고, 심지어 어렵사리 설치된 북한인권재단이 2년 넘게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2018년 사무실이 폐쇄되는 고초를 겪고 있다. 일각에서는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북한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는 것인지 답답해하고 심지어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설사가상으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마저 북한인권에 대해 침묵하고 김정은과 악수하고 웃으며 사진 찍는 모습에 북한인권운동가들과 탈북자들이 허탈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더욱 질문하고 싶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일가와 히틀러 중 누가 더 악랄하고 나쁜가요?” 만약 그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중 더 처참한 곳이 어디인가요?” 라고 되묻고 싶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이미 역사로 남겨졌지만, 북한의 정치 범수용소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굶고 매맞고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다. 이제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 이들의 죽음이 누적되고 있다. 한반도 평화,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염원이다. 그런데 도대체 한반도 평화가 무엇인가? 김정은만 누리는 평화인가? 북한주민 모두가 누리는 평화인가? 평화가 오면 인권과 자유가 따라오는가? 인권과 자유가 온 뒤에야 평화가 오는가?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염원하는 한반도 평화는 김정은 뿐 아니라 2천5백만 북한주민들 모두가 누리는 평화이다. 그리고 이 평화는 자유와 인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폐쇄되고 갇힌 자들이 자유롭게 되며 그들도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동등한 인권을 누릴 때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평화를 위해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자들을 대신하여 정치범수용소 철폐를 계속해서 외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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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K조선, 정치범수용소(특별독재대상구역) 일지 http://nk.chosun.com/bbs/list.html?t able=bbs_28&idxno=3131&page=8&total=209&sc_area=&sc_word=

2 김수암 외, 유엔조사위원회(COI) 운영사례연구, (서울:통일연구원,2013) 7쪽

3 이연철, 유엔 북한인권조사위 최종 보고서 배경과 전망, 미국의 소리, 2014.2.18. https://www.voakorea.com/a/1853197.html

4 앞의 기사

5 마이클 커비 외 2인,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 보고서 (제네바:유엔인권이사회, 2014)

 

 

[이 글은 월간 JESUS ARMY 2019년 8월호(기획특집 '복음통일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에서 전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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