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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8C 영국의 시대적 상황과 존 웨슬리의 신앙적 배경

 

 

 

 

 

 

 

1. 18세기 영국의 시대적 상황

 

1.1. 사회적 상황

 

오랫동안 농사와 목축을 주로 하던 영국사회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산업도시가 생기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18세기 영국에 일어났던 변화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자본주의의 형성, 둘째 공업의 발전과 산업도시의 형성, 셋째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이다.

 

기계의 발달이 가져온 산업혁명은 여러 가지 파장을 일으켰는데, 우선, 농사에 기계가 도입되면서 대량생산 기술이 들어섰고, 이로 인해 소작1 농민들은 땅과 일자리를 잃고 산업도시로 몰려가 공장이나 광산의 노동자로 직업을 바꾸어야 했다. 또, 갑자기 형성된 산업도시에는 몰려드는 노동자들의 낮은 도덕수준과 무질서한 생활습관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고용주들은 이들을 이용할 뿐 그들의 삶의 질(質)을 개선해주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정부도 이를 돌보아줄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로 인해 인구의 70-80%를 차지했던 하층민들(노동자들, 영세한 농민과 상인, 광부들)은 주로 도시의 변두리와 슬럼지역에서 매우 열악하고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18세기는 영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로 평가될 만큼 부패하였다. 도시에는 술집, 사창가(私娼街), 도박장, 투견장(鬪犬場)이 흔하였고 살인, 강도, 도둑질, 싸움이 빈번하였다. 수많은 가정이 파탄되었고, 감옥은 항상 만원상태였다.

 

1739년경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가 부흥운동을 일으킨 중심지인 브리스톨(Bristol)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브리스톨은 주변에 석탄과 주석 광산이 많아 광산노동자들이 많았고, 당시 영국에서 가장 활발하면서도 타락한 무역 항구였으며, 수천 명의 노예들을 풀어놓고 신체등급 심사를 하던 광장도 있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하층민들이 존 웨슬리의 야외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던 주 청중들이었다.

 

1.2. 종교적 상황

 

영국은 1534년, 로마로부터 교회를 독립시켜 국가가 다스리고 통제하기 위해 ‘영국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를 세운다. 그런데 국교회에 소속된 많은 교회들은 권력에 지배를 받고 타협하면서 귀족과 상류층을 위한 교회가 되었고,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부 성직자들은 엄청난 금액의 생활비와 부수입을 받으며 호화와 사치를 누렸다. 그들의 설교는 귀족과 부자들을 두둔하고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또 교구(敎區)를 맡은 사제들 중에는 자기가 담당한 교구 내에 거주하지 않고 생활비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도심지에 살면서, 사제보(司祭補: curate, 부교역자)를 고용해서 교구의 일을 돌보게 하는 편법을 쓰는 자도 있었다. 이렇게 특권층을 위한 종교가 되어버린 영국국교회는 비천한 노동자들이 적응하기 힘든 고교회(高敎會: high church)가 되어버렸다.2

 

또 이신론(理神論: deism)이 18세기의 영국교회를 붕괴시키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이신론이란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기에 기적이나 계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상이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신앙추구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하층민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교회는 점점 더 능력을 잃어갔다.


이렇게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급증과, 이들에 대한 관리와 교육의 부재로 인한 도덕적 타락, 또 정치와 권력층의 부패는 18세기 영국을 어둠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어야할 교회마저도 권력층과의 유착으로 인한 타락, 이신론의 대두 등으로 인해 오히려 더 큰 어둠에 빠져 있었다.

 

이처럼 암담한 18세기의 영국에, 하나님이 부흥의 큰 바람을 일으킬 존 웨슬리를 보내시는데, 웨슬리의 복음적 신앙의 배경과 부흥의 불씨가 일어난 배경을 살펴보자.

 

2. 존 웨슬리의 신앙적 배경

 

2.1. 존 웨슬리의 탄생과 성장 (1703~1711년)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엡웟(Epworth)에서 19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부모님 모두 신앙의 명문가 출신인데,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 1662~1735)는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오고, 여러 권의 신학 책을 저술한 학자였고, 영국국교회의 성직자였다.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 1669~1742)는 25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당대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청교도의 경건과 신학에 정통한 여성이었다. 특별히 그녀는 신학 뿐 아니라, 어학, 문학, 역사, 교육학에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자녀들을 경건과 학문으로 교육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존 웨슬리가 6살 때 사택에 불이 났었는데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이때 어머니 수산나는 존 웨슬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고 믿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존 웨슬리를 키웠다고 한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 고교회(high church)의 경건주의 신앙을 지켰고 교구 목사로서 충실하게 사명을 감당하였다. 어머니 또한 교구민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교구민들의 어머니 역할을 잘 해내었다. 이렇게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교회사에 빛나는 세 아들이 자라났는 데, 장남 사무엘은 영국국교회의 성직자이자 훌륭한 교육가였고, 15번째 아들 존 웨슬리는 메소디즘(Methodism: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앙과 규율을 따르는 주의)의 창시자이자 위대한 전도자였으며, 그리고 18번째 아들 찰스도 메소디즘의 창시자이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찬송작가로 이름이 나있다. 엄격한 부모님으로부터 경건훈련을 받으며 자랐기에, 존 웨슬리는 스스로 10세까지는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어머니 수산나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는 훈련’의 내용을 보면,
. 주일을 성수하기

. 가족기도회에 철저히 참여하기

. 부모에게 순종하기

. 회초리를 두려워하기

. 잘못하여 매 맞고 울 때에는 소리 내지 않고 울기

. 아플 때에는 무슨 약이든 잘 받아먹기

. 침대보와 이부자리 교체, 옷 입고 벗기 등은 스스로 하기

. 거짓말 안 하기

. 집안에서 큰소리 내지 않기

.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brother, sister를 붙이기

. 남의 소유권 침해 안 하기

.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에는 조용히 말하고, 겸양의 예의 지키기

. 경박한 말이나 장난 안 하기

. 시간과 약속은 정확하게 지키기

. 식사시간에 제멋대로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 요구 안하기

. 음식을 버리거나 남기지 않기

. 간식 안 먹기

 

이러한 규칙을 잘 지킬 때에는 칭찬과 상이 주어졌으며, 잘 지키지 않을 때에는 벌을 받았다. 그리고 자녀들이 많은 관계로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 수산나와 상담의 시간을 가졌는데, 엄마에게 고민도 말하고, 잘못도 고백하고, 엄마로부터 용서와 칭찬과 위로와 사랑을 받는 시간이었다. 존 웨슬리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었던 어머니와의 데이트 시간이 그의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하였다.


2.2. 이신론을 탈피하는 배경이 된 유령 체험 (1716~1725년)

 

존 웨슬리는 열 살 때까지 어머니 수산나 아래에서 가정교육을 받으 며 성장하였다. 그 후 1714년 1월 28일 런던에 있는 사립기숙학교인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e School)에 입학한다. 그 곳에 머무는 1716년부터 1717년 사이에 고향 엡웟 목사관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가졌던 존 웨슬리는 이후 자기 자신도 유령을 체험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였 고,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만을 고집하는 무신론과 합리주의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3. 옥스퍼드 학생 시절 (1720~1725년)

 

존 웨슬리는 차터하우스 과정을 마친 후 1720년에 옥스퍼드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에 입학하였다. 존 웨슬리는 일평생 약 100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독서 습관은 어릴 적 아버지 사무엘로부터 지도받은 것이며, 특히 초대 교부(敎父)들의 책을 많이 읽도록 훈련받았다. 옥스퍼드에 있는 동안에는 약 580여 권의 책을 읽었는데, ‘성경 좀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성경 외에도 교부들의 고전, 고전 문학, 고전 철학, 고전 역사, 중세 신비주의 영성, 경건 문학 등에 심취하였다. 이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지리, 의학, 예술,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 등 폭넓고 다양한 독서를 즐겼다. 이러한 독서가 신학 저술과 설교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존 웨슬리의 독서 목적은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경건에 이르기 위함이었다. 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달아 실천하고자 하였다. 

 

2.4. 생애 전체를 바치는 첫 번째 회심 (1725년)

 

존 웨슬리는 10세까지 죄를 짓지 않았다고 고백하였으나, 부모님 곁을 떠난 11세부터 대학학부과정을 마친 22세까지 11년 동안은 죄 가운데 살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후에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한 것, 여자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 영적 독서를 통하여 큰 감명을 받은 것 등이 원인이 되어 1725년에 회심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토마스 A. 켐피스(T.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 제레미 테일러(J. Taylor)의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Rules and Exercises for Holy Living and Holy Dying)」, 윌리엄 로우(W. Law)의 저서들을 읽으며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을 읽고 나서, 존 웨슬리는 이런 고백을 하였다.

 

“즉시로 나는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였다. 즉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드리기로 결심하였다. 내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하며, 만일 내 삶의 어느 부분이라도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마귀에게 바친 것이 된다. 나는 내 삶에서 하나님 섬기기와 마귀 섬기기의 중간은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1725년에 일어난 변화로 존 웨슬리의 생애 목표는 확고해졌다. ‘완전한 헌신, 완전한 성화, 완전한 사랑,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이루는 것이 었다.


2.5. 옥스퍼드 메소디스트의 탄생 (1729~1735년)

 

메소디스트 운동은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시작하였다. 형 존이 엡웟과 루트에 가 있는 동안, 찰스는 매주일 저녁에 두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과 함께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대화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존 웨슬리가 1729년 11월 말 경에 옥스퍼드에 돌아와서 동생의 고전연구를 지도하였는데, 이것이 ‘신성회(Holy Club)’의 시작이다. 이 때 신성회 멤버들이 얻게 된 별명이 ‘메소디스트3 ’이다. 신성 회의 회원 수는 점차 늘어 1735년에는 약 4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께 모여 독서와 대화와 기도를 함으로써 서로의 경건을 증진하였다. 또한 이들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을 금식일로 정하였다.

 

신성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의 경건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구제와 봉사에도 참여하였다. 감옥의 죄수들을 규칙적으로 방문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빚으로 인해 감금된 죄수들의 빚을 청산해주면서 죄수들을 전도하였다. 또 주변의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도왔으며, 극빈자의 자녀들을 모아 옥스퍼드 대학 내에 간이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쳤다.

 

옥스퍼드 메소디스트들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했듯이 경건(piety)과 자비(mercy)를 병행하는 실천적 성결(practical holiness)을 이루었다. 이로써 신성회는 처음에는 학문적 발전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시작하여 경건의 훈련을 더하고, 나아가 사랑을 실천하는 모임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것은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그 다음에 교회를 개혁하고 나아가 사회를 성화하는 진정한 기독교적 개혁운동의 기틀이 된 것이다. 신성회에 존 웨슬리가 붙인 또 한 가지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그리스도인(Bible Christians)’이다. 존 웨슬리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란 모든 생활에서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걸으셨던 대로 걸으며, 모든 언행에서 그리스도와 완전하게 일치하도록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철저히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모임이 신성회였다.


2.6. 미국 조지아 선교 중에 만난 모라비아교도들 (1735~1738년)

 

옥스퍼드에 머물며 학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던 존 웨슬리에게 예기치 않은 선교의 길이 열린다. 1735년 10월 14일, 존 웨슬리는 미국의 조지아를 향해 선교의 항해를 출발하였다. 119명이 동선한 배에는 26명의 독일 모라비아교도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어느 날, 큰 폭풍을 만나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모라비아교도들은 비바람에 젖고 넘어지면서도 평화로운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송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존 웨슬리는 충격을 받았다. 죽음의 공포에 비명을 지르고 있던 영국 교인들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때 존 웨슬리는 영국의 메소디스트들에게는 경건의 규칙과 습관은 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속죄의 은총은 마음속에 없으며, 그들에 게 기도문과 예배순서는 있지만, 진심으로 부를 찬송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조지아에서 선교를 하는 동안, 존 웨슬리는 계속해서 충격을 받는다. 모라비아교 목사인 스팡겐베르그(Spangenberg)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피 흘려 죽으셨음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존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확실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주이신 것은 알았지만, 자신의 구주이신 것은 몰랐던 것이다.

 

모라비아교도들과의 만남을 통해, 존 웨슬리의 신앙과 사역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성령체험에 눈뜨기 시작했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구원의 은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 회중 찬송, 주일학교, 주간학교(day school) 사역이 시작되었다. 모라비아교도들과의 만남이 메소시즘을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2.7.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의 완전한 회심 (1738년)

 

존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에 실패하였다고 스스로 낙심한 채 런던으로 돌아온 후, 마침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교 목사 피터 뵐러(P. Böhler)를 알게 된다. 그는 존 웨슬리보다 9살이나 어린 나이었지만, 웨슬리에게 복음주의 신앙을 가르쳐 주었고, 마침내 회심에까지 이끌어준 영적인 교사다. 피터 뵐러는 존 웨슬리에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얻느냐고 묻는 존 웨슬리에게, 뵐러는 먼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 얻기를 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고 어느 한순간에 주어지는 순간적 회심이라 할 수 있으며, 이 회심은 자신이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았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믿음을 얻을 때가지 믿음에 대한 설교만 하라”는 뵐러의 조언에 따라 존 웨 슬리가 감옥의 사형수들에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권면하고 기도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죄수가 당장에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체험한다.

 

이후 존 웨슬리는 더욱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집중하였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 21일, 동생 찰스 웨슬리가 먼저 회심의 체험을 하면서, 찰스가 앓고 있었던 늑막염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던 바로 그 날에 깨끗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로부터 며칠 뒤 5월 24일 밤,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라비아 신도회의 기도모임에 참여했다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듣는 중에, 존 웨슬리도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하였다. 그날의 일기 내용이다.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영원히 제거하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 거듭남의 체험은, 가톨릭의 공로주의적 구원론의 영향을 받아 선행과 경건의 형식에 치우쳐 있었던 영국국교회의 전통을 깨뜨리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동안 존 웨슬리는 완전한 성화를 갈망하였지만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만으로는 결코 그것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고, 조지아 선교의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느끼고 낙심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 모라비아교도들을 통하여 전해 받은 복음인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피 흘리셨다’ 는 사실이 믿어짐으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에서의 회심의 중요성을 정리해 보면,
1) 종의 믿음에서 아들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2) 율법주의 신앙에서 복음주의 신앙으로 변화되었다.

3) 도덕적인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영국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 구원관을 벗어나,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주의 구원관을 붙들게 되었다.

4)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확고해졌다.

5) 이전에는 인간이 먼저 ‘성화’를 이루어야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 (칭의)’을 받아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였으나 자기의 도덕적인 노력의 한계를 깨닫고, 무조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속죄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칭의)’을 받는다는 사 실을 알게 되었다. (‘성화’ 후에 ‘칭의’가 아니라, ‘칭의’ 후에 ‘성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6)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속죄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였다. [마음 뜨거움(warm-heartedness)]

8) 메소디스트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9) 이신론으로 냉랭했던 교회와 영국국교회를 개혁하는 불씨가 되었다.


2.8. 페터레인 신도회 모임 중, 성령강림 사건 (1739년)

 

존 웨슬리는 회심을 체험한 지 3주 후에, 독일에 있는 모라비아교의 중심지 헤른후트(Herrnhuth)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초대교회의 정통(正統)이 살아 있는 모라비아 공동체를 만났는데, 거기서 함께 지내는 동안,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찬송으로 드리는 예배, 세계 선교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기도,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 등을 체험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발견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 뜨거운(warmhearted)’ 사랑이 있었고, 동시에 서로를 향한 ‘마음 뜨거운’ 사랑과 기쁨의 교제가 있었다. 이 ‘마음 뜨거움(warm-heartedness)’이 메소디스트 신앙에도 접목되었다.

 

존 웨슬리는 독일에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피터 뵐러가 설립한 페터레인 신도회(Fetterlane Society)를 이끌게 되었다. 1739년 1월 1일 저녁 약 60여명이 모인 정기모임에서, 오순절 마가다락방을 방불케 하는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고, 이렇게 붙은 성령의 불은 마침내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의 야외설교를 통해 큰 부흥운동으로 영국을 뒤덮기 시작하였다.4


3. 정리


어둡던 18세기 영국을 강력한 부흥의 불길로 뒤집었던 존 웨슬리는 갑자기 나타난 혜성이 아니었다. 존 웨슬리는 경건하고 훌륭한 부모님 아래에서 엄격한 신앙지도를 받으며 자랐고 늘 성화를 꿈꾸며 거룩한 독서, 신성회(Holy Club) 활동,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메소디스트로서 몸부림을 치며 성장했다. 또 존 웨슬리를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조지아 선교 실패, 모라비아교인들과의 만남, 올더스게이트에서의 회심, 마침내 페터레인 신도회 모임에서 성령체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어둡던 땅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기 위해 일찍이 존 웨슬리를 택하시고 빚으시고 준비시키셨다.

 

* 참고도서 : 김진두, 「존 웨슬리의 생애」, 2006, KMC

 

(주)

1 소작(小作) : 남의 땅을 빌려 짓는 농사

2 고교회(high church)는 본래 경건과 거룩함이 높은 교회를 일컫는 이름이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평민들과 노동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워진 문턱이 높은 교회란 의미가 되고 말았다

3 Methodist = 규칙쟁이 :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따르는 이들을 조롱하며 부르던 이름

4 야외설교를 먼저 시작한 것은 조지 휫필드이다. 휫필드는 1739년 2월 17일에 야외설교를 시작하였고, 존 웨슬리는 휫필드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6주 후인 4월 2일에 야외 설교에 동참하였다. 야외설교를 강하게 반대하던 찰스 웨슬리도 6월 24일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이 글은 월간 JESUS ARMY의 2019년 7월호에서 전재한 것입니다.]


북한주민 직접 돕기, 왜 필요한가?
김 성 근 목사 노원한나라은혜교회 현재 북한주민들이 겪고 있는 열악한 상황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권단체들과 국제기구들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원조와 지원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물자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북한정권은 처음에 국제적인 지원물자를 주민들이 아니라 군대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이는 곧 국제사회가 알게 되었고 국제사회는 투명한 지원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정부는 국제지원 단체의 감시가 있는 곳에서만 일반 주민들에게 일부 공급하였고 없는 곳에서는 아예 공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탈북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럽의 한 기금회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공급하라고 유럽에서 처리하기 힘든 쇠고기를 대량 구입해서 북한정권에 납품하였습니다. 이때 정말로 주민들에게 공급되도록투명하게 집행하기 위해 한 명의 감독관이 함께 왔다고 합니다. 북한 정권은 평양시 주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줄 때처럼 줄을 세워서 그 감독관앞에서 쇠고기를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쇠고기를 받아든 주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 영역 ...22차 북한구원기도성회 셋째 날
제22차 북한구원기도성회 셋째 날 집회가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 교수) 주최로 11일(목)에 수원 흰돌산수양관에서 열렸다. 셋째 날은 특별히 북한구원을 위해 금식기도회로 진행되었다. 이날 첫 시간은 어제에 이어 김재동목사(하늘교회)가 ‘거룩한 대한민국(Ⅱ)’ 시간에 ‘해방.건국.호국 투쟁의 교훈’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하였다. 김목사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민족 가운데 역사하신 크신 일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서 특별히 6.25전쟁에 대해서 가르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자유’를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들이 그 ‘자유’의 소중함을 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국가적 위기가 초래되었다며 교회는 6.25전쟁의 역사를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두 번째 강사로 김북한목사(탈북민)가 ‘북한 선교’를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김목사는 북한주민들이 김일성 동상 앞에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했었는데 90년대 이후부터 김일성을 신처럼 믿지 않기 시작했다며 김일성 숭배가 무너졌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김일성 우상을 허무는 ‘하나님의 선교’를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김목사는 북한에서 복음이 가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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