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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기독교는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주 강 식 목사
신학박사

 

3.1운동은 한국 근대사에 큰 획을 긋는 민족운동이다. “개항 이후 전개된 민족운동을 하나로 합일시켜 전민족적 단계로 확산”시키며 “한국독립운동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가장 큰 특징은 비무장, 비폭력 운동으로 일어났던 운동이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만 그치지 않고 중국과 대만,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운동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각계각층의 참여로 약 1년간 지속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총칭”이다. 각계각층이 동원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기독교계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는 전국적인 조직망과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고, 미국 등 외국과의 연락망이 선교사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다. 또 인적 자원은 사회에서 국민의 정신 개량과 사회사업을 이루는데 역할을 했다. 초교파적인 YMCA라는 기구가 발족되어 국민계몽의 선두가 되었다. 3.1운동은 전 국민이 참여하는 거족적 운동이었지만, 본고에서는 기독교계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1. 3.1 독립만세운동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는 했지만, 국내에서도 암암리에 독립운동이 거론되었다. 파리 평화회의에 대한 소식은 이미 국내에서도 선교사들과 YMCA를 통하여 알려져 있었다. 기독교계의 세계정세 창구는 경성 YMCA와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국내에서 독립에 대한 논의는 학생세력과 종교계가 있었다. 학생들은 주로 YMCA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종교계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그 중심을 이루었다. 2.8독립선언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국내로 들어와 3.1운동 추진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19년 1월 송계백은 서울에 도착하여 자기 은사인 최린(전 보성중학 교장)과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을 찾아가 모자 속에 감추어 두었던 2.8선언서를 끄집어내어 보이면서 국내외적으로, 거족적으로 일어날 것을 호소했다. YMCA 회우부 간사 박희도는 1월 23일경 회우부 위원이었던 연희전문학생 김원벽과 논의하고 각 학교 대표들을 초치했다. 보성법률상업학교, 경성의학전문, 경성공업전문, 경성전수학교, 연희전문, 배화여고 등 학생들이 모의에 참여했다. 이들은 학생들 주최로 독립운동을 주장하다가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통합 추진 소식을 듣고 함께 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두 종교계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개최하는 행사에는 참여치 않고 일반 학생들만 집회를 돕는 것으로 결정했다.

 

천도교계는 최린을 통해 2.8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교주 손병희가 독립운동에 찬동을 했다. 천도교의 신도는 약 300만 명이라고 하지만 동원력이나 조직력에 있어서 기독교계에 비하여 허약했다. 기독교인수는 234,703명이었으나 조직력, 의식화, 동원력에 있어서 천도교를 능가했다. 천도교에서는 이승훈에게 연락하여 기독교와 합작으로 독립운동을 제안하여 동의를 받았다. 두 종교계가 처음부터 합작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과 천도교 측과 합작할 것을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이 동의하므로 찬성 결의했다. 손병희는 독립선언문을 최남선에게 의뢰해 놓았다. 기독교계에서는 함태영이 대표가 되고, 천도교계에서는 최린, 불교계에서는 한용운으로 결정되었다. 합작은 “초교파적이며 초신앙적인 YMCA의 이념”이 크게 작용했다. 전택부는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 신률(神律), 자연법 등 차원 높은 정신”에서 다룬 것이라 했다.

 


그 달 28일 밤 양전백, 길선주, 정춘수, 유여대 4명을 제외한 29명(총 33인)이 손병희 집에 모여 마지막 의논을 했다. 선언 장소는 이미 파고다 공원으로 결정되었으나 박희도가 장소 변경을 요구했다. 그는 그의 미국인 은사인 연희전문 교수 베이커 박사(Dr. A. L. Becker, 백아덕)에게 일제를 자극하지 않도록 내실에서 하도록 조언을 받았다. 장소는 명월관 인사동지점(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일본 경찰은 3.1운동의 거사를 전혀 몰랐다.
 

3월 1일 하오 2시 태화관에 33인 중 4명을 제외한 지도자들이 모였다.1 파고다 공원에는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하여 33인의 대표가 독립선언하기를 기다렸다. 파고다 공원에 지도자들이 나타나지 않자 강기덕 등 학생대표들이 태화관으로 달려가 대표 중 몇 사람이라도 와서 선언문을 낭독해 달라고 했으나 거부당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평양감리교회 이규갑 전도사와 그의 친구 해주 교회학교 교사 정재용이 공원으로 달려가 정재용에 의해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파고다 공원에 운집한 수만 학생, 시민들은 33인의 지도자들과 대면하지 못했고 지도를 받지 못했으나 3월 1일 가두시위와 5일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점에 대한 비판도 있으나, 33인의 민족 지도자들은 전원 사형 집행될 것을 각오했으므로 실내든, 실외든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도자의 공백을 염두에 두어 15명(총 48인)의 지도자를 두어 3.1독립운동을 승계해 나가도록 했다.2 15명도 대부분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검거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함태영은 전후운동계획의 입안과 연락책으로 해서 3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3.1운동이 거족적인 운동이 된 것은 초교파, 초종교적 이념으로 하는 오화영, 이승훈 같은 YMCA 지도자들의 역할 때문이었다. 민족대표 33명 중 기독교 대표가 16명이었는데, 그 중 YMCA 관계자들이 9명이었다.

 

(주)

1 길선주, 김병조, 정춘수, 유여대는 불참했다.
2 그들은 함태영, 김지환, 최남선, 송진우, 이경섭, 한병익, 김홍규, 김수태, 김원벽, 김세환, 강기덕, 정노식, 현상윤, 임규, 안세환이다.

 


2. 3.1 운동에서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1) 정신·사상적인 면
3.1독립선언서에는 독립, 자주, 인류평등과 정의, 인도, 평화, 인류공영, 양심 등이 나타난다. 김행식은 독립선언서의 세 가지 초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반만년 역사와 2천만의 인격을 가진 “우리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것은 하늘의 명령이라 했다. 하늘이 주신 민족적 주체성이요 자유인의 선언이다. 둘째는 무력침략의 옛 시대는 지나가고 “도의의 신천지가 도래했음을 선포했다.” 봄을 맞이한 만물과 더불어 ‘부활’이 성취된 것이다. 한국민이 지닌 종교적 역사관의 선언이다. 셋째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의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곧 동양과 세계평화의 운동인 것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전개를 꿈꾸고 새 역사를 향해 선언한 이것이 곧 3.1정신이요 한국의 민족정신이요 또한 한국의 기독교적 민족정신의 요체인데 놀랍게도 천도교와 불교가 함께 공감한 것은 민족정신이다.


세 종교가 함께 선언했으므로 어느 특정 종교의 고유한 언어로 표기할 수는 없었지만 근저에 흐르는 정신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독립선언서의 정신은 기독교적 사랑, 평화, 정의, 자유에 입각해 있다.


이만열은 3.1운동 독립선언문에 나타난 비폭력정신으로 볼 때 일부 종교적 색체가 보이는 듯하지만 “분명히 종교운동은 아니다.”라고 했다. 단지 기독교 정신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민족과 조국을 발견한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고난에 뛰어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택부는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을 면담했는데,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나는 의식적인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습니다.…하나 나는 대체로 어려서부터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당시의 애국지사들은 대개가 기독교 교인들인 만큼 그들과 무시로 상종하는 동안 자연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나의 사상에서 기독교적 영향을 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비록 그가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이승훈, 안창호, 전덕기 등 기독교인을 무척 존경하였다. 특히 전덕기 목사에게 받은 감화가 크다고 말했다. 그와의 면담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① 본래 정의니 자유니 독립이니 하는 말은 우리나라에는 없던 말로서 기독교가 처음 수입한 말이다.
② 무저항 정신도 기독교의 정신인데, 나는 신구약 성경, 특히 외경을 읽다가 무저항 정신을 깨달았다.
③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이준씨 등이 상동교회 뒷방과 종로 청년회관을 왔다 갔다 하면서 꾸며진 것이다.
④ 3.1운동은 천도교가 단독으로 하고 싶었지만 힘이 약하여 기독교와 손을 잡기로 방책을 세웠다.
⑤ 그 당시 기독교 세력은 천도교의 세력에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했다. 그 당시 기독교의 교회당 수와 천도교의 교회당 수를 계산해 보니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최남선에게는 기독교적 사상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기독교적 사랑, 정의, 평화, 독립 사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3.1운동은 거족적 항일민족운동으로서 “평화적 시위운동”이었다. 이러한 비폭력적 저항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천도교는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했으며, 그들의 신앙에는 철저히 무력항쟁의 정신이 들어있다.
그러나 천도교에서도 1919년 1월 18일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모여 독립운동의 본격적 조직과 준비를 했다. 이 자리에서 세 가지 원칙을 합의했다. “①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② 독립운동을 일원화 할 것, ③ 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 이것은 교리상의 선언이 아니라 “정책상 필요”에 의해 채택된 것이다.

 

 

기독교는 비폭력 저항정신을 강조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이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이런 사상을 잘 알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는 기독교의 인기 있는 부흥사였다. 3.1운동 당일에 늦게 도착하여 자진 수감되었으며 조사 심문에서 “금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비유컨대 동생이 형에게 대하여 여차히 교육을 성취했으니 나는 형주와 분리하여 독립 자영하겠다고 요구함이요, 결코 하등의 반항심으로 요구함이 아닌즉 결코 중대한 죄라 말할 수 없는 것이요”라고 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묘비에 변영로가 글을 썼는데, “그 중 특기할 것은 3.1 운동의 방법을 지정한 것이다. 그 때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실 때, 다수인은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선생이 남을 살육하느니보다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제의하시었다. 그리하여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되어, 인류 역사상 우리가 영광스러운 사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비록 그가 33인과 15인에 이름을 넣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의 정신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초기 단계에서 기독교인 만세운동 참가자에게 배포된 “독립단 통고문”에는 비폭력정신이 여실히 나타난다.

 

우리의 존경스럽고 고귀한 독립단원 여러분이여.

무슨 일이든지 일인(日人)들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이니 독립의 주의를 손해케 할 뿐인즉

다 바라건대 각자 주의할지며…


3.1운동의 비폭력 정신은 동아시아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도에서 간디(Mahatma Gandi)가 영국에 대한 저항 방법으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선언했고, 중국에서 항일운동인 5.4학생 운동으로 이어졌다. 대만인들은 국가주의를 자각해 자치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3.1 독립운동은 민중의 비폭력운동으로서 민족의식의 정당한 표시이며, 독립의식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일본을 타도의 대상에서 넘어 공존공영하자는 세계평화와 국제정의에 입각한 인도적 요구였으며, 자유민주주의 정체관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선언서에서도 “배타적 감정의 절제와 질서에 의한 운동임”을 천명했다. 일경에 의한 무자비한 유혈사태로 일부 폭력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다수는 평화적 독립만세운동으로 확산되었다.

 

 

2) 조직적인 면


3.1 독립만세운동은 교회가 중심적 역할을 했다. 1910년 전후 장로교회 독노회, 총회 등이 조직되므로 민족적, 종교적 역량을 편제화 할 수 있었고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총독부는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시켰으나 종교단체와 교육기관은 외국 선교사와 연계되었으므로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 3.1운동의 주도세력은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학생들이었다. 여기서 학생계는 사실상 거의 기독교로 볼 수 있다.


국내에서 3.1운동을 획책한 곳은 서울, 평양, 정주였다. 서울에는 손병희, 최린 등을 중심한 천도교계 지도자들과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등을 중심한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 평양에서는 김선두, 변인서, 도인권, 이덕환 등 기독교의 목사와 장로가 중심이 되었고, 정주에서는 이승훈, 김병조, 이명룡 등 목사와 장로들이 3.1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3.1운동은 하루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5월까지, 이후 만주에서 계속해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중심지는 어디서나 교회였다.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개성, 안주, 정주, 선천, 의주 등 제1회 만세 시위처가 교회였다. 초기 3-4월의 시위 1,214회의 운동 중 주동세력이 뚜렷한 340회를 지역별로 나누면, 311개 지역이다. 이 가운데 기독교가 독자적으로 주동한 것이 78개, 천도교는 66개, 천도교와 공동으로 주동한 것이 4개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1919년 한국의 인구는 약 2천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기독교인은 25-30만 명으로 추산된다. 기독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1-1.5%에 지나지 않았다. 1919년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의 “제3회 총회록”에 의하면 1918년 장로교회 1,896개, 미(북)감리교가 565개, 남감리교가 252개로 총 2,713개이며, 교인수는 장로교 144,062명, 미감리교 44,941명으로 총 189,003명이었다. 1918년 기독교계통의 교회는 모두 3,154개였다. 통계에서 빠진 교단을 고려하면, 그 해 교인은 200,0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3.1운동은 거족적인 운동이었으며, 천도교와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단체가 선도 주도했지만, 그 핵심과 힘은 기독교를 경로로 하고 있다. 1919년까지 일제의 무단통치로 일체의 집회와 단체의 형성이 불가했던 때에, 교회의 전국적인 유기적 연결망을 통한 비밀의 연락과 그 보장, 거사의 동시성은 효율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이끌었다. 항거정신이 충천할지라도 민중 동원력이 없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1 독립만세운동은 비폭력 항거로 시작했으나 정부 수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해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 요직에도 기독교인이 포석했다. 한국교회는 임시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운영자금을 지원했다. 3.1운동은 거족적 독립운동이었지만, 기독교회라는 주체가 있어서 출발되었고, 진행되었고, 정부수립에까지 발전했다.

 

여기에 대한 일제의 반응은 기독교회와 교회학교에 대한 방화와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과 구타, 체포, 고문, 처형, 갖은 학살로 나타난다. 어떤 지방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만세운동을 벌였는데도 기독교인만 잡아갔다. 인명피해는 제외하고 “가옥, 재산상의 피해는 기독교 외의 종교나 단체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에 일제가 3.1 운동의 주도세력을 기독교인으로 본 것이다.

 

3) 애국종교적 면


일제의 무단통치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반일, 애국충군의 종교로 변모했다. 천주교는 한국 땅에 들어올 때부터 ‘무군무부(無君無父), 혹세무민의 종교’로 낙인 되어 척사윤음을 내려 포교를 금지 당했다. 개신교도 척사윤음에 해당되었으나 한국은 세계조류의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개화가 필요했고 여기에 기독교는 “개화의 종교”로 등장한다. 명성황후가 살해되었을 때도 고종 곁에서 불침번을 써가며 보호했던 자들이 기독교의 선교사였다.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의한 하나님의 뜻으로 보았다. 이승훈은 재판에서 “한일합병도 신의 뜻에 의한 것이며 그 원인은 국민 각자의 죄에 의한 것이므로 독립의 방법도 2천만 국민 모두가 각자의 죄를 회개함에 있다”고 함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으로 확신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3.1독립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위원회에서 펴낸 The Korea Situation에서 “예수 믿는다는 말과 폭동을 일으키겠다[독립 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이 지금 한국에서는 동의어가 된 것이다.”는 평가는 한국 기독교회가 애국종교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김린서도 “일제시대에는 순국자와 순교자를 구별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은 이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일제 무단통치의 탄압으로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애국적 성향으로 변모했다.

 

3. 결론


3.1독립만세운동에서 나타난 민족대표 33인의 태도와 기독교계의 태도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인 공격도 없지 않다. 민족대표 33인이 선교사의 조언을 받아 갑자기 장소를 바꾸어 태화관에 있었던 점, 33인이 서명하고도 직접 공포하지 않았던 점, 교단차원의 적극적인 대응이 없었다는 점, 「기독신보」에 3.1운동에 대한 보도가 없었던 점 등이다. 민경배는 3.1운동의 주도는 이광수와 천도교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교회는 “운동의 통로” 역할을 했다고 축소한다.

 

3.1 운동은 기독교계와 천도교계 그리고 학생계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계와 학생계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크게 두 세력으로 구별할 수 있다. 교회는 성경에 바탕을 둔 정신과 사상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단체이므로 그 정신은 3.1운동과 독립선언서의 바탕이 되
었으며, 교회의 결속력, 통일력, 조직력을 통하여 3.1운동을 가능케 했고, 확산시켰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있었고 비종교화를 외쳤지만, 일제의 탄압은 기독교회가 민족주의 색채를 지닌 애국종교의 의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북한주민 직접 돕기, 왜 필요한가?
김 성 근 목사 노원한나라은혜교회 현재 북한주민들이 겪고 있는 열악한 상황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권단체들과 국제기구들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원조와 지원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물자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북한정권은 처음에 국제적인 지원물자를 주민들이 아니라 군대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이는 곧 국제사회가 알게 되었고 국제사회는 투명한 지원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정부는 국제지원 단체의 감시가 있는 곳에서만 일반 주민들에게 일부 공급하였고 없는 곳에서는 아예 공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탈북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럽의 한 기금회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공급하라고 유럽에서 처리하기 힘든 쇠고기를 대량 구입해서 북한정권에 납품하였습니다. 이때 정말로 주민들에게 공급되도록투명하게 집행하기 위해 한 명의 감독관이 함께 왔다고 합니다. 북한 정권은 평양시 주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줄 때처럼 줄을 세워서 그 감독관앞에서 쇠고기를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쇠고기를 받아든 주
“통일한국 건설에 쓰임받는 자가 되라!”
부산 강서구 신호동에 위치한 장대현 학교는 통일한국을 세워갈 통일 세대 일꾼들이 자라고 있는 대안학교입니다. 양강도 대홍단, 자강도 강계, 함경북도 무산, 중국 요녕성, 중국 산둥성, 부산, 서울, 창원... 장대현 학교에 다니는 21명의 학생들은 태어난 고향과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을 통해 통일의 모습을 배워가며 작은 통일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친구들과 농구 경기를 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통일한국을 든든히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북한 성도님들과 함께 찬양을 드리는 찬양 인도자가 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분단으로 인해 생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장대현학교 학생들은 학교생활을 통해 통일한국 건설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장대현학교는 장대현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장대현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임창호 목사님께서는 2007년 부산 사하구 다대포지역에서 탈북민 성도님들과 함께 장대현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탈북민 성도님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고충을 들으시고,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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