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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이 상 원 목사
예수사랑교회

 

2009년 역사교과서 개정교육과정 하에서 검정심사를 통과한 2014년 중학교 『역사』 교과서는 총 9종이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총 8종이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에 대한 본문과 사진을 수록한 교과서가 중학교는 단 2개(두산동아, 지학사) 고등학교는 단 1개(지학사)뿐이었다. 본문과 사진 중 하나라도 수록한 교과서는 중학교 2개, 고등학교 3개였고 유관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교과서는 중학교 5개, 고등학교 4개였다.

 

유관순 관련 내용이 빠진 것에 대한 교육부의 지적에 대해서 집필자들이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있기에 기술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3.1운동기념사업회’는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박하면서 “유관순이 17세 소녀로서 3.1만세운동을 벌여 일제의 재판을 받아 숨진 것은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판결문에 1번이 유관순, 이어서 삼촌인 유중무, 조인원의 순으로 나온다. 나이가 훨씬 어린 유관순이 1번이 된 것은 일제가 유관순을 가장 중대한 범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유관순은 재판부에 의해 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손병희 선생의 3년형보다 높았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을 교육부에 전달함으로써 유관순에 대해 서술하지 않았던 출판사들은 2015년부터 각 교과서에 유관순을 넣기로 결정하였다.

 

 

올해는 3.1운동 백주년 되는 해이다. 3.1만세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관순의 역사적 진실과, 유관순의 삶과 성품, 그리고 유관순의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거 1년간 일인(日人)은 이날을 무효화하려 하였고 우리는 이날을 유효하게 하려 싸웠소. 일인의 최대 문제는 이날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외다.” (『독립신문』, 1920. 3. 2.)

 

상해 제1회 3.1운동 기념식에서 안창호의 위 발언은 3.1운동이 일본 제국주의에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3.1운동은 제국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식민지국가도 각성시켰다. 그러기에 조선총독부는 3.1운동에 관한 발언을 금지시켰고 그것을 ‘망동사건’으로 호칭했다. 또한 언론도 기미년사건 정도로만 표현하도록 통제했다.

 

성장과정과 신앙생활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지평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 유중권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흥호학교를 설립했고 친척인 유빈기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유빈기는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내려와 1908년 지평리교회(현 매봉교회)를 개척하였고 유중권과 조인원(조병옥의 부친)이 교회를 섬기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훗날 아우내 만세운동의 한 축을 형성한 매봉교회 교인들에게 만세운동을 지도한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 집안의 가풍은 전통적인 유교 분위기와 신학문의 기독교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어 유관순이 신앙을 통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환경이 되었다. 사촌언니 유예도는 유관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중 하나로서 선교사들 사이에 그 총명함이 알려져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몇 년 뒤 유관순도 선교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1916년 3월 말 경에 서울에 도착한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두 사람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 박인덕 선생이다. 독립운동가와 상해 임시의정원의 의장으로 더 유명한 손정도 목사를 통해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 사랑이 곧 나라 사랑임을 배우게 된다. 박인덕 선생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옥중에서도 양부모와 친지들을 잃고 큰 절망 가운데 있던 유관순을 격려하고 지도해 주었다. 박 선생은 3.1운동 때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고 또한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 독립군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의 신앙생활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그러나 이화학당에서 함께 공부한 서명학, 이정수, 남동순, 특히 유관순과 함께 신앙생활과 구국운동을 했던 서명학(전 이화여학교 교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화학당에서는 매일 오전에 채플과 성경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은 경건한 분위기이면서도 열성적인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썼다. 새벽기도회는 간절히 기도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모든 프로그램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주일이 되면 학감과 교장이 앞에 서고 학생들이 둘씩 짝을 지어 정동교회로 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유관순은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감동을 경험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학대받고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너 모세야 이제 가라’고 하는 강렬한 이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관순이 앞으로 져야 할 민족의 고난과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화학당에서의 애국활동


3.1운동은 3월 1일을 기점으로 서울을 시작으로 한 달여 동안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해외에서도 이 운동에 참여했을 정도로 그 반향은 지역과 계층을 초월했다. 3.1운동의 독특성은 전국적이고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이지만 수년 동안 계획하여 준비한 운동이 아니었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처음 모여서 회의를 시작한 것이 2월 11일이었으니 불과 20일도 되지 않는 기간에 민족운동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화학당은 오후 3시만 되면 일제히 수업을 중단하고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이문회는 학생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모임이다. 유관순은 이문회에서 활동하며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이화학당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다. 2월 28일 이문회의 정기모임에서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한다. 학교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3월 1일 만세시위운동에 이어 3월 5일 학생 연합시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로 일본총독부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린다.

 

3.1운동 초기에 독립선언서가 조직적으로 전달된 곳은 서울을 비롯한 평양, 개성 등 지방 대도시들뿐이었다. 지방 소도시나 농촌에서 3.1운동을 알게 된 것은 고종의 장례(因山)에 참여했다가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거나 서울의 강제휴교로 귀향한 학생을 통해서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지방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고향에서의 애국활동


3월 13일 유관순은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오게 된다.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귀향은 대규모 만세운동 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도착한 다음 날인 주일 밤, 지평리교회에 모인 조인원 등 20여명이 유관순으로부터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상황을 듣게 된다. 그리고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병천)장날에 거사를 행하기로 결정한다. 지평리에 총본부를 두고 아우내를 중심으로 여섯 고을에 연락하기로 하였고, 각 지역대표를 지평리교회 조인원에게 보내기로 한다. 유관순은 각 마을과의 연락 및 조직사업 전개 등 비밀 행동을 전담한다. 3월 31일 밤에는 내일을 약속하는 신호로 매봉에서 봉화를 올리면 각 지역책임자들도 이에 호응하는 표시로 봉화를 올리기로 한다.

 

 

충청도에서는 만세운동이 횃불을 통하여 마을과 마을로 확산되었다. 이 지역에서 항일운동이 강하게 일어난 배경은 동학농민군의 최후 결전지이고 을미사변 후 반일 개화인사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주는 감리교의 중심 선교구로 기독교인이 많았다. 이들은 대체로 애국심과 항일의식이 강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이 잘 조화되어 3.1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난 곳이 아우내였다. 충남의 첫 만세운동은 3월 3일 예산에서 일어났다. 점차 충남전역으로 확산되어 3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는 절정에 달했다. 특히 3월 29일은 천안읍내에서 3천여 명이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대규모 시위에 놀란 일본헌병은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하며 26명을 체포하였다. 천안 만세시위는 다소 늦게 출발하였으나 규모와 추진 면에서 일본헌병의 무력을 압도할 기세였다.


거사 하루 전인 3월 그믐날 밤 매봉꼭대기에서 봉화를 올렸다. 약속대로 봉우리마다 불길이 올라와 동서남북 24개의 환한 봉우리가 그믐밤 하늘을 밝혔다. 4월 1일 거사의 날, 사람들이 아우내 장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은 대한독립의 필요성을 주창하였다.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군중들은 대오를 형성하여 만세시위 행진에 나섰다.

 

대규모 시위로 인해 헌병분견소는 천안본대에 증원요청을 한다. 일본 헌병대와 충돌이 일어나면서 헌병이 내리친 칼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고 투석전을 벌인다. 일본헌병들은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한다. 이곳에서 유관순의 양부모가 목숨을 잃었고 아우내장터는 온통 피바다가 된다. 40여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일본헌병들은 마을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우내 만세운동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시위운동이며 전국적으로도 가장 격렬한 시위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아우내 만세운동은 조선독립이라는 하나의 명분으로 유림계와 기독교계, 전통적 지식인과 신식교육 세대, 성별을 초월한 남과 여, 청장년과 노인 등 다양한 계층이 지방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운동으로서 항일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소녀 유관순의 의견이 타당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녀가 지도적 동지로서 존중받는 것도 한국여성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대문감옥에서의 수감생활


유관순은 만세시위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법원검사국으로 송치된다. 일심에서 조인원과 유중무와 함께 7년 구형에 3년형이 선고된 것은 유관순의 역할과 그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이다. 경성 복심법원(2심)의 유죄판결 ‘이유’에서 유관순이 주모자임을 설명하고 있다.

 

제1 피고 유관순은 在경성 이화학당 생도인 바 3월 1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각처를 행진하며 독립시위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 동 월 13일 귀향하여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시장 장서는 것을 이용하여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꾀하고 자택에서 태극기(대형)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동일 하오 1시경 동 시장으로 나아가 그 곳에서 수천 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시위운동을 감행하여 치안을 방해하고…

 

유관순은 상고심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음을 항변하며 걸상을 집어던지는 행동으로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된다. 가족들이 살던 집은 불에 타고 오빠는 공주감옥에 수감되고 사랑하는 양부모는 일본헌병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고 어린 두 동생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유관순은 온 몸이 고문으로 망가진 상태에도 낮에는 만세를 부르다 끌려가 매를 맞고 밤이면 분함과 괴로움으로 울부짖었다.

 

당시 서대문감옥에는 애국인사들이 상당수 수감되어 있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옥중 만세운동을 준비한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외치는 만세소리가 부근 동네로 퍼져나가 일반 주민도 함께 만세운동을 함으로 전차가 불통되고 헌병 기마대가 출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애국인사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는데 유관순은 방광이 터지고 이신애는 유방이 파열되기까지 고문을 당한다. 계속되는 투쟁과 고문으로 유관순은 전신이 퍼렇게 멍들어 살이 썩어 들어간다. 그리고 1920년 10월 12일 만 17세 나이로 옥사한다.

 

유관순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화학당 학당장 프라이와 교사 월터는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공식적인 요청절차를 밟는다. 이때 유관순의 친척인 유빈기와 유중영 부자도 참관한다. 유중영의 증언에 따르면 유관순의 시신은 실로 처참한 상태이긴 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바처럼 신체 일부가 절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0월 14일 오전 10시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진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유관순의 3.1운동은 세간에서 잊혀진 채 세월이 흘러갔다. 해방을 맞이하며 유관순의 스승으로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박인덕 선생에 의해서 유관순의 애국적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박인덕 선생은 유관순의 옥중투쟁 사실들을 알리며 1947년 8월 이화여학교 교장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한다. 그해 11월 말 병천면에 있던 기념사업회 사무소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조직(1)을 재편하며 유관순 정신을 국내외 동포에게 보급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1) 명예회장 조병옥, 회장 오천석, 고문 서재필,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김규식, 위원 정인보, 최현배, 장지영 등으로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 조직 구성

 

유관순의 독립정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러시아의 적색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정이 붕괴되고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함으로 약소민족들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해방을 고대하고 있었다. 3.1운동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에게 우리의 억울한 마음을 알리고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간절한 수신호였다. 지금의 지식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결정적인 동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해방기의 좌익과 1970년대 초반의 좌편향된 인사들은 1917년 11월 레닌의 러시아혁명이 3.1운동의 동인인 것으로 설명한다.

 

해방 후 한반도는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쟁에 휩싸인다. 민족주의의 우익과 공산주의의 좌익과의 싸움에서 초기에는 좌익이 주도권을 갖는다. 해방 전 좌익은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 혁명론을 채택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강한 혁명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0C 전후 일본과 싸워 패했던 러시아와 중국은 공산국가가 되어 일본 제국주의와 다시 맞서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은 우리 독립투사와 함께 항일투쟁도 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도 자주독립을 위해 좌익과 우익이 함께 하였다.

 

좌익은 소련의 사상적 지도와 혁명자금 지원으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며 강력한 혁명투사가 된다. 해방 후 한반도에 세워질 국가의 청사진도 다른 공산국가와 같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우익은 국가의 청사진도, 이데올로기도 분명하지 않았다. 1946년 8월 미군정에서 실시한 남한 정치체제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의 77%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찬성했고 자본주의는 불과 14%만 찬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승만 정부를 비롯한 건국세력은 미국과 같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자유민주공화제의 헌법도 제정했는데 77%의 국민이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했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문맹률이 80% 가까이 되는 국민들에게 정치체제를 쉽게 이해시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의 전제통치하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하에서 백성으로, 신민으로 살아왔으니, 치열한 좌·우 대립에서 우익이 승리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하였지만 국민계몽운동이 절실하였다.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기독교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는 기독교를 그렇게 탄압하였다. 깨어있는 지식인들은 기독교가 한민족을 개화시켰고 기독교사상이 불교, 유교에 이어 앞으로 한민족이 지탱해야할 정신적 지주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 민족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33인 민족대표의 구성이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인 것은 바로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합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유관순의 독립정신이며 대한민국 건국정신인 것이다. 까막눈의 국민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미지 작업이 필요했다. 여기에 가장 부합한 이미지가 바로 유관순인 것이다.


훌륭한 여성 애국열사들이 여럿 있지만 유관순만의 독특한 이미지가 있다.


- 수난의 표상 :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엘리트 여학생, 잔혹한 고문에 희생당한 유관순은 민족의 수난을 상징한다.
- 순수의 표상 : 해방 후 좌·우 대립이 치열한 상황 속에서 유관순은 일찍 죽었기에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았다.
- 새로운 사상 :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애국활동을 하였다. 기독교는 한민족을 개화시켰고 새롭게 만들어질 나라를 선진 문명국가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부각된다.
- 모성적 이미지 : ‘누나’라는 모성적 이미지를 통해 계급, 이념, 빈부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희생’이라는 정신은, 변하지 않는 ‘누나’의 이미지처럼 이 민족이 함께 할 영원한 가치이다.

 

그러므로 건국세력이 유관순의 이미지 작업을 한 것은 그의 독특성을 통해서 계급과 종교를 초월하고 자기희생적인 애국심과 생명의 숭고함 그리고 자율적이며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상처로 가득한 한민족의 마음을 열고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인 것으로 이해한다. 3.1운동 100주년 되는
올해에 대한민국에 다시 유관순의 독립정신을 부활시켜야 한다.

 

1948년 5월 ‘유관순전기 간행회’에서 출간한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목사이자 소설가인 전영택이 집필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 당시 문교부장이자 유관순기념사업회의 회장이었던 오천석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시방 우리나라에 제일 큰 근심거리가 되는 것은 우리 겨레의 사상이 혼란하여 통일되지 못하고 청년남녀의 정신이 떨어지고 해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에 16세 소녀 유관순이 깨끗하고도 굳세인 애국정신을 가지고 용감스럽게 싸우다가 마침내 생명을 바쳐서 나라를 순(殉)한 사실을 가졌다는 것은 진실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자랑거리… 해방 후에 비로소 발견한 우리는 하루바삐 우리 삼천만 동포에 알리고 싶고… 건국정신을 힘 있게 일으키고저 함이다."

 


북한주민 직접 돕기, 왜 필요한가?
김 성 근 목사 노원한나라은혜교회 현재 북한주민들이 겪고 있는 열악한 상황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권단체들과 국제기구들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원조와 지원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물자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북한정권은 처음에 국제적인 지원물자를 주민들이 아니라 군대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이는 곧 국제사회가 알게 되었고 국제사회는 투명한 지원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정부는 국제지원 단체의 감시가 있는 곳에서만 일반 주민들에게 일부 공급하였고 없는 곳에서는 아예 공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탈북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럽의 한 기금회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공급하라고 유럽에서 처리하기 힘든 쇠고기를 대량 구입해서 북한정권에 납품하였습니다. 이때 정말로 주민들에게 공급되도록투명하게 집행하기 위해 한 명의 감독관이 함께 왔다고 합니다. 북한 정권은 평양시 주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줄 때처럼 줄을 세워서 그 감독관앞에서 쇠고기를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쇠고기를 받아든 주
“통일한국 건설에 쓰임받는 자가 되라!”
부산 강서구 신호동에 위치한 장대현 학교는 통일한국을 세워갈 통일 세대 일꾼들이 자라고 있는 대안학교입니다. 양강도 대홍단, 자강도 강계, 함경북도 무산, 중국 요녕성, 중국 산둥성, 부산, 서울, 창원... 장대현 학교에 다니는 21명의 학생들은 태어난 고향과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을 통해 통일의 모습을 배워가며 작은 통일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친구들과 농구 경기를 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통일한국을 든든히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북한 성도님들과 함께 찬양을 드리는 찬양 인도자가 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분단으로 인해 생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장대현학교 학생들은 학교생활을 통해 통일한국 건설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장대현학교는 장대현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장대현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임창호 목사님께서는 2007년 부산 사하구 다대포지역에서 탈북민 성도님들과 함께 장대현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탈북민 성도님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고충을 들으시고, 탈

“복음통일은 한국 교회의 사명입니다”...북한구원금식성회 셋째날 스케치
제21차 북한구원 금식성회 셋째날 집회가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 교수) 주최로 31일(목)에 수원 흰돌산 수양관에서 열렸다. 이날 첫 강사로 나선 김북한 목사(노원한나라선교센터)는 탈북자 목회자이다. 김 목사는 “평양 대부흥 때엔 성령이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임했다. 이 일로 성경읽기 운동이 일어나 기독교학교가 생기고 한글이 국문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했다. 또한 양반에게만 주어졌던 교육의 기회가 모든 평민과 천민에게까지 주어지는 교육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했다. 김 목사는 지금 북한은 복음이 탈북민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장마당을 통해 남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 남한이 더 잘 살고 있다는 것과 탈북민을 돕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알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김 목사는 탈북민이 가족에게 송금한 것은 가족의 생계뿐만 아니라 장마당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한다. 그러나 탈북청년 등 송금할 수 없는 처지인 사람들이 있다며 한국교회가 아프리카 사람을 입양하듯이 북한가정을 입양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김목사는 한국교회가 이 운동에 앞장선다면 복음통일을 이룰 수 있다며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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