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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3.1독립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이억주 목사

한국교회언론회 대변인/공동대표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펼친 1919년 3월 1일,  3.1운동은 숭고한 민족정신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이는 계승해야 할 민족의 아름다운 한 역사이다. 극악무도하고 무법한 압제자 일본제국을 향하여 폭력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는 분노를 절제된 행동으로 나타냈고,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충분히 표현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내용도 그렇고, 독립만세운동의 전개는 문화민족의 모습으로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식민지 무단통치가 근본원인이다. 나라 잃은 국민들의 설움과 분노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강압, 무단통치에 폭발하였다. 한일병탄 이전에도 일제 침략에 대하여 얌전히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1895년 8월 20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로 인하여 분노한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서 전국 곳곳에서 저항하였다. 을미의병(乙未義兵)이다. 1905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것에 분노한 백성들이 일어난 을사의병(乙巳義兵) 저항이 있었으며,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분노한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저항이 있었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이후 1910년 소위 한일합방 조약으로 일제는 조선을 강압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이어진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는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내적인 요인이 되었다.

 

첫째, 동화정책이다.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충성스런 신민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서,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민족의 우수성을 말살하는 왜곡된 역사교육을 강행했으며, 민족주의를 표현하는 어떤 학문도 허용하지 않았다.

 

 

둘째, 경제적인 강탈이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을 벌여서 법을 가장하여 토지를 강탈했다.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서 등록되지 않은 조선인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갔다.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당시 국민들은 토지를 강탈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국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든가 아니면 만주나 연해주 땅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기독교 탄압정책이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장애로 기독교를 지목하였고, 기독교계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1912년에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기독교 인사를 대대적으로 검거 투옥하고 불법재판으로 처벌하였다. 더욱이 1905년에 발효한 사립학교법은 기독교를 압제하는 법으로 기독교학교에서 성경공부와 채플을 금지하는 등 기독교 탄압에도 열을 올렸다. 일본 순사들은 교회의 모든 예배를 감시하고 설교 내용을 검열하였고, 심지어 교회의 모든 예배, 기도회에 직접 참석해서 설교내용과 교인들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찬송가 중에도 금지곡을 지정하여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등이 금지곡이었다. 설교내용도 여호수아와 갈렙, 다윗의 용맹 등에 관한 내용이나,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규제하였다. 그런가하면 종교서적 출판에 대하여도 검열이 철저하여 전도지 내용까지 문제를 삼아서 발행을 불허하였다. 한 예로 “조선의 형제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를 격퇴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에 대해 일본을 악마로 여기게 한다고 하여 발행을 금지하기도 했다.

 

 

넷째, 민족정신을 병들게 하기 위해 일제는 화투놀음을 장려하고, 조선 남성의 타락을 목적으로 일본 창녀들을 들여와서 공창제도를 신설하였다. 또한 아편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영국이 청나라에서 시행하던 것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경제와 육체까지 병들게 하는 정책이었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분노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경찰과 헌병이 민간인들까지 무단 감시하고 박해를 가해 온 일에 대하여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였다. 공권력에 의한 악행이 얼마나 원성을 샀는가는 3.1 운동 이후에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3.1운동이 발발하게 된 것은 외적인 요인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세계 제1차 대전이후 1918년에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란 ‘각 민족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강대국들에게 식민 지배를 당하던 많은 약소국들과 민족들은 큰 희망과
함께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해외에 있던 인사들이 먼저 정보를 접하였고 이들에 의하여 공유되었으며 또한 국내로 유입되기에 이른 것이다. 먼저 중국에 망명해 있던 인사들이 독립을 위한 결사체인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을 조직하였으며, 김규식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청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접하고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소식이 국내로 알려지자 대대적인 민족독립운동에 동력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는 국내 3.1 독립선언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같은 국내외의 분위기를 타고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국내의 독립운동이 1918년부터 점차 국민들에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는 주로 학생들과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천도교가 먼저 교단 내에서 뜻을 모으고 이 큰 일을 독자적으로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 종교계와 함께 하기로 하여 기독교와 불교에 협력을 구하였다. 이렇게 독립을 위한 운동을 계획하고 진행하던 중에 고종의 서거소식이 전해졌다.

 

고종의 사망은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국민들은 매우 분노하였다. 이런 국내 사정에 해외, 특별히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사건을 접하자 국내에서도 대대적으로 운동을 전개해야겠다고 판단한 집행부(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는 거사 일자를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그 날을 기하여 전국에서 서울로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3월 3일에 거사하기를 제안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고종 인산일에 대규모 집회와 독립선언을 하는 것은 황제의 마지막 가는 날에 예의가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면 고종의 인산일 보다 하루 앞서서 3월 2일로 하자는 의견에 대하여는 3월 2일은 주일이므로 기독교계를 배려해서 주일은 피하고 그 앞날 토요일인 3월 1일로 결정한 것이다.

 

3.1 독립운동의 의의(意義)와 정신은 독립선언서에 담겨있는데,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최남선의 증언에 의하면 자유. 평화. 평등. 인도적 정신 등의 언어는 기독교 정신이라는 것이다. 3.1 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하였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었다. 이 비율(16:15:2)은 그간 일제식민치하에서 각 종교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였던 역할부분의 비율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자연스럽다.


외래종교로 취급받던 기독교는 1885년 복음 전래 이후 35년 만에 이미 우리민족의 중요 사안에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아 민족대표 33인의 비율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민족주의 애국자들은 ‘기독교회는 우리 민족의 교회다’라는 발언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로 1919년 3.1 운동은 기독교가 일제에 의하여 많은 고난과 희생이 있었으나 이는 조국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음이 틀림없다.

 


북한주민 직접 돕기, 왜 필요한가?
김 성 근 목사 노원한나라은혜교회 현재 북한주민들이 겪고 있는 열악한 상황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권단체들과 국제기구들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원조와 지원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물자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북한정권은 처음에 국제적인 지원물자를 주민들이 아니라 군대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이는 곧 국제사회가 알게 되었고 국제사회는 투명한 지원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정부는 국제지원 단체의 감시가 있는 곳에서만 일반 주민들에게 일부 공급하였고 없는 곳에서는 아예 공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탈북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럽의 한 기금회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공급하라고 유럽에서 처리하기 힘든 쇠고기를 대량 구입해서 북한정권에 납품하였습니다. 이때 정말로 주민들에게 공급되도록투명하게 집행하기 위해 한 명의 감독관이 함께 왔다고 합니다. 북한 정권은 평양시 주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줄 때처럼 줄을 세워서 그 감독관앞에서 쇠고기를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쇠고기를 받아든 주
“통일한국 건설에 쓰임받는 자가 되라!”
부산 강서구 신호동에 위치한 장대현 학교는 통일한국을 세워갈 통일 세대 일꾼들이 자라고 있는 대안학교입니다. 양강도 대홍단, 자강도 강계, 함경북도 무산, 중국 요녕성, 중국 산둥성, 부산, 서울, 창원... 장대현 학교에 다니는 21명의 학생들은 태어난 고향과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을 통해 통일의 모습을 배워가며 작은 통일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친구들과 농구 경기를 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통일한국을 든든히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북한 성도님들과 함께 찬양을 드리는 찬양 인도자가 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분단으로 인해 생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장대현학교 학생들은 학교생활을 통해 통일한국 건설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장대현학교는 장대현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장대현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임창호 목사님께서는 2007년 부산 사하구 다대포지역에서 탈북민 성도님들과 함께 장대현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탈북민 성도님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고충을 들으시고,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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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북한구원 금식성회 셋째날 집회가 에스더기도운동(대표 이용희 교수) 주최로 31일(목)에 수원 흰돌산 수양관에서 열렸다. 이날 첫 강사로 나선 김북한 목사(노원한나라선교센터)는 탈북자 목회자이다. 김 목사는 “평양 대부흥 때엔 성령이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임했다. 이 일로 성경읽기 운동이 일어나 기독교학교가 생기고 한글이 국문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했다. 또한 양반에게만 주어졌던 교육의 기회가 모든 평민과 천민에게까지 주어지는 교육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했다. 김 목사는 지금 북한은 복음이 탈북민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장마당을 통해 남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 남한이 더 잘 살고 있다는 것과 탈북민을 돕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알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김 목사는 탈북민이 가족에게 송금한 것은 가족의 생계뿐만 아니라 장마당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한다. 그러나 탈북청년 등 송금할 수 없는 처지인 사람들이 있다며 한국교회가 아프리카 사람을 입양하듯이 북한가정을 입양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김목사는 한국교회가 이 운동에 앞장선다면 복음통일을 이룰 수 있다며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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