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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여자이고 싶다”... 탈북여성들의 인권이야기

2018 북한자유주간 행사에서 북한 내 여성인권 유린 참상 고발

뉴스윈코리아 기자2018.05.31 02:31:16

정리: 남윤성 객원기자(백석신대원)


올해로 15회를 맞는 북한자유주간 행사가 2018년 4월 28일부터 시작되었다. 행사 9일째를 맞은 5월 4일, 국제PEN망명북한센터(이하 PEN망명센터)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나도 여자이고 싶다-현실문학을 통해 바라본 탈북 여성들의 인권이야기>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참석한 PEN망명센터 소속 여성 작가들은 자작시 낭독과 자신이 겪은 북한 내 여성 인권 유린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PEN망명센터의 김정애 이사장은 “남북정상회담으로 모두 평화가 온 듯 들떠 있는 분위기지만 탈북민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 포기와 북한 주민들의 자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어떤 방향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지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고 이 행사의 취지를 밝혔다. 참석자들이 겪은 북한 내 여성 인권유린의 참상은 전 세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끔찍하기까지 했다.


<김정하 작가>


“오늘”, 이 두 글자가 마음속에 뜻깊게 다가옵니다. 북한의 2,500만 명 동포들의 아픔이 날마다 계속되는 그 오늘, 나 한 사람의 용기를 통해 그들의 현실이 (모두에게) 전해질 수 있는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글을 썼습니다.


저는 함경북도의 가난한 가정에서 5녀 1남 중 4째로 태어나 희망과 복음 없이 늘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고난과 가정의 아픔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8살 때 엄마와 셋째 언니는 약도 한번 사용하지 못하고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모와 언니가 떠난 후 우리 가정은 빛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청진으로 장사를 했지만 가정의 고난은 벗어날 수 없어 결국 2003년 2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탈북을 했습니다.


한 달만 나가 돈을 벌고 돌아오려 했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인신매매로 팔렸습니다. 한족 남자에게 팔려갔고 그곳에서 저는 진수성찬이 차려진 밥상 앞에서도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가정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확인을 하려 했는데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하지 않고 개인 의사를 집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검사를 한다면서 내 몸을 묶고 자궁을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망칠 수 없었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가정에 팔렸고 동거하며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 갑자기 공안에 잡혀 배에 주사를 맞고 강제 낙태를 당했습니다. 아이는 산 채로 배 밖으로 나왔지만 의사 선생이 아이의 목을 눌러 죽였고 우리 아기는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발버둥 쳐도 도망을 칠 수 없고 그 가정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신을 하고 딸을 낳으니 “우리 집에는 아들이 필요하지 딸은 필요 없다”며 핍박을 했습니다. 모진 핍박에 결국은 딸을 데리고 도망을 나와 장백산에서 가이드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자궁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 2007년 7월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 이동 중에 내몽골에서 잡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험난했습니다.


결국 3개월 뒤 강제 북송 당했습니다. 함께 잡힌 일행들과 한국행이 아니었다고 말하자고 약속했지만 모두들 고문 끝에 한국행이라고 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사를 받으러 갈 때는 걸어 들어가지만 조사를 받고 나갈 때는 두 발을 질질 끌고 기어 나왔습니다. 5평 남짓한 조사실의 벽은 피로 물들어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온몸에 못이 박혀 피가 나고 그 고통은 어느 누구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제발 아픔을 잊게 해달라고, 이겨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3일간 모진 고문을 마치고 대기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는 기뻤습니다. 여기 사람들로부터 감찰과 과장이 여성들을 성추행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3일 후 저 역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내가 저항하면 강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저항해도 내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고 내 아픔을 받아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성폭행과 강간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결국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덧으로 인해 임신 사실을 들킨 저는 산부인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중국 놈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며 마취도 없이 낙태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 한마디 할 자유도 없었습니다. 마취도 안한 몸으로 내려왔지만 그 다음날 구치소로 끌려가 중국 놈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8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으며 자그마한 쇠갈고리로 손바닥에 피가 날 때까지 처벌을 받았습니다.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3개월 뒤 3년형의 교화소 형을 받고 전거리 교화소로 갔습니다. 전거리 교화소로 갈 때 몸이 많이 쇠약해져 두 다리로 걸을 수 없어 기어나갔습니다. 죽으러 가는 길 같았습니다. 교화소에 들어가니 온 몸을 벗기고 돈이 있는지 확인하려 자궁 검사를 했습니다. 머리를 자르고 개인의 옷을 잘라 교화소 복으로 만들어 입었습니다.


40일 후, 교화반으로 배정받은 첫 날, 산으로 나무를 캐러 가는데 무엇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시체가 타다 만 다리였고 이곳이 사람을 태우는 불망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수용시설은 500명을 수용하는 규모였는데 석 달도 되지 않아 5천여 명이 되었습니다. 매일 3-4명이 시체가 되어 나갔으며 한, 두 대의 차가 그들을 싣고 불망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곳에서 성폭행을 당했으며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곳 안에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것은 저 한사람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교화소 내 사람들뿐만 아니라 북한의 2500만 명의 아픔이었습니다.


그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불쌍한 영혼들을 살려달라고. 인간을 믿어, 김 씨 일가를 믿어 오늘의 아픔을 겪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우리 백성들이 사는 길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 중국과 대한한국의 현실, 자본주의 등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 그곳에서 만난 하나님께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고통 가운데 기도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저 한 사람의 목소리가 2500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한 사람의 목소리로 자유 없는 북한의 현실이 온 세계에 폭로되고 북한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온 세계에 전달되길 원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평화 통일은 진짜가 아님을 우리 국민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복음만이 북한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 통일은 오직 복음 통일,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통일뿐입니다.


<이경옥 작가>


북한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막내 자녀가 중국으로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끊겨 찾기 위해 중국에 들어갔다가 공안에 붙잡혀 2002년 5월 5일 북송되어 처음으로 족쇄를 차고 온성 보위부에 가게 되었습니다. 검열을 할 때 나체로 옷을 벗기고 검열을 하였습니다. 검열 받기 위해 기다리는 여성들로 보위부 방과 복도가 꽉 찼습니다.


그 후 안전부 돌격대에 넘겨져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땅땅한 땅에 맨발로 나가 일을 해서 발이 다 찢겨 피가 줄줄 났습니다. 일을 제대로 못하면 발로 차이고 구타를 당했습니다. 저는 여자가 아닌 김정은의 노예였습니다. 말이라도 하면 그와 동시에 삽자루로 내리쳐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밥으로 준 썩은 강냉이밥을 먹고 설사를 했습니다. 바지에 변이 묻어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생각도 나지 않고 오직 ‘살아야겠다.’ 이것뿐이었습니다.


40일 정도 강제 노동을 하다 집결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썩은 시래기 국, 썩은 강냉이가 나왔습니다. 거기서도 혈변과 설사를 했습니다. 낮에는 제철소에서 나온 유리가루를 땅바닥에 말리고 그것을 나르는 일을 시켰는데 어린 애들한테까지 이 일을 시켰습니다. 또한 시멘트를 만들어 운반을 시켰습니다.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몰골이 형편없었습니다.


노동 단련대에 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북송된 사람들이 기차 하나에 가득 차 온 적도 있었습니다. 오전 5시부터 일을 시작했으며 노동 강도는 너무 쎘습니다. 열이 40도까지 올라가 너무 고통스러운 날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당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는데 의사들이 제가 죽은 줄 알고 시체실에 눕혀놓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시설이 열악해서 링거를 맥주병에 거꾸로 눕혀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혈관이 너무 얇아 주사를 제대로 놓을 수 없자 저에게 그 링거액을 마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시니 가슴이 너무 저려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곳에서 여자들은 수치도 부끄러움도 몰랐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지금 얼마나 굶고 있습니까? 보위부원들도 죽을 먹습니다. 김정은은 비대해질 정도로 잘 먹고 있습니다. 오직 남한을 갖기 위해서 이기자, 다 먹자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평화입니까? 가짜입니다. 자기 형을 죽이고, 자기 매부를 죽이는 김정은에게 대통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의 여성 인권은 노예(수준)입니다.


<김정애 PEN망명센터 이사장>


저는 북한에서 주민들에게 혁명 실력을 학습시키는 학습 강사 일을 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굶어서 가족이 누워 있었고 먹을 것이 없어 물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지만 자녀들에게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백두산에서 한일 무장시기 빨치산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않아서 일주일씩 굶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9살, 5살짜리 어린 아이들을 설득하고 위로했습니다.


어느 날 딸이 아편을 따러 갔다가 사탕 다섯 알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니 딸이 아편을 채취하다가 진액에 취해 쓰러졌는데 군인들이 진흙물을 먹이고 사탕 다섯 알을 입에 넣어주었는데 가족들에게 나눠주려고 입에 넣어준 것을 먹지 않고 가져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족들이 배고픔을 견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쌀밥을 실컷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단 한 번도 이 아이에게 배부르게 먹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탈북을 했을 때 한 중국 사람이 김정일은 왜 2,000만 명을 먹여 살리지 못하냐고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누구라도 들을까봐 장군님 욕하지 말라며 그 사람의 입을 막고 김정일을 두둔했습니다. 그런 저를 그는 “먹고 살지 못해 (중국에) 왔으면서”라며 조롱했습니다.


1년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김일성, 김정일은 원래 체질이 뚱뚱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있으면서 잘 먹으니 살이 찌고 배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내가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사실에 너무 분했습니다. ‘아, 우리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김정일에 속아 살았구나.’ 그래서 중국에서도 계속 글을 썼습니다.


대한민국에 와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침묵하는 것은 공범이다. 김일성 김정은이 두려워 침묵한다면 나도 공범이다. 굶주리고 얼어 죽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도 공범이며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글을 써서 국제 사회에 알리고 있습니다. 같은 여자와 엄마로서 자식이 물에 빠지고 주리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북한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김정금 여사가 <김정은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편지 내용 생략)


이어서 북한자유주간 대회장을 맡고 있는 수잔 솔티 여사의 격려사가 있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용감한 증언을 해준 이들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북한에는 문학, 영화, 음악, 연예 없이 독재자의 찬양만 있을 뿐이다. 한국 정부와 사회는 김정은이 북한주민들에게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알도록 UN의 북한 인권조사위원회(COI) 리포트를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 자리의 참석자들 모두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말에 동감하며,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믿고 더욱 목소리를 내어 우리가 겪었던 일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말하고 또 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를 맡은 이애란 박사는 “간부들은 회사의 여성들을 자기의 노리개로 생각을 한다. 성폭행을 거부한 여성을 정치범수용소로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며 북한 내 여성들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대하여 부연 설명했다. 이 박사는 “자유가 없는 북한 주민들의 삶, 특히 연약한 여성들이 중국과 북한을 넘나들며 겪는 인간 이하의 고통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21세기 자유대한민국의 비극입니다.”라며 북한의 참혹한 여성 인권 실태에 대해 대한민국 사회가 무관심과 침묵에서 깨어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이 글은 월간 JESUS ARMY 2018년 6월호에서 옮겨 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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