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목록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성경에 나타난 연합금식기도

뉴스윈코리아 기자2018.01.06 21:42:39

데릭 프린스 목사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와 금식저자

 

금식은 기도를 강화시킨다

 

금식에 대해 성경에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단순한 정의로부터 시작해 보자. 금식이란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음식을 삼가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보기

그리스도인의 금식에 관한 연구의 가장 좋은 출발점은 산상수훈에서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 6:1~18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 서로 관련된 의무, 곧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각각의 의무에 관하여 가르치실 때 동기를 중요시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종교적 외식 행위를 경고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든 제자들이 이 세 가지 의무를 모두 이행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각각의 의무에 관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알 수 있다. 마태복음 6:2¹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6²에서는, “또 너희는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단수)”라고 말씀하시고, 7³에서는, “(집단으로) 기도할 때에(복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7에서, “너는 (개인적으로) 금식할 때에(단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한번도 만약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 할 때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사용하는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뜻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든 제자들이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 의무를 이행할 것으로 기대하시는 것이다. 특히 기도와 금식 의무는 정확히 같이 가고 있다. 당신의 제자들이 늘 기도할 것을 기대하듯이, 금식도 마찬가지로 늘 실천할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1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 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2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3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4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금식은 그리스도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종교적인 의무로 받아들여졌다. 유대인들은 모세 시대 이후로 지속적으로 금식해 왔다. 바리새인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자기네처럼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 예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8~20)

  

단순한 예화 형식으로 대답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랑이란 신약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고,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이라는 기간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갖고 제자들과 함께 하며 이 땅에서 사역 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은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간 날로부터 시작되어,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다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된다. 그때까지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 돌아올 날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기간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이고, 이 시기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명확하게 말씀 하신다.

 

그날에는 (그들,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니라 (2:20)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금식은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됨의 표징이다. 예수님은 금식을 단지 가르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몸소 실천하심으로 본보기가 되어주셨다.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자마자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4:1~2)

 

누가복음의 이 기록은 예수님이 40일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았다고 하지만,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고 하면서, 예수께서 목말라 하셨다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음식만 삼가시고 물까지 금하신 것은 아니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40일 금식 기간 중 예수님은 사탄과 직접 영적 전쟁을 치르셨다.

 

누가가 예수님의 금식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묘사한 표현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처음에 누가복음 4:1에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나중에 누가복음 4:14에는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셨을 때, 그분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하신 상태다. 그러나 금식 후 광야에서 나오셨을 때는 성령의 능력을 입고 돌아오셨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예수께서 받으셨던 잠재된 성령의 능력이 금식을 다 마치신 이후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금식은 예수님께서 공적 사역에 들어가시기 전에 거쳐야 했던 최종적인 준비단계였다.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적용되었던 영적 법칙이 제자들의 사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14:12)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사역 패턴을 따르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다. 한편, 요한복음 13:1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3:16)

 

이 말씀은 사역의 준비과정에 적용된다. 만약 금식이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 준비과정에 필요한 한 부분이라면, 제자들의 사역 준비에 있어서도 필요한 한 부분인 것이다.

 

초대 교회의 관습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다. 금식은 바울의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직후, 바울은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9:9)

 

그 이후로 금식은 사도 바울의 일상적인 영성 훈련 방법이었다. 고린도후서 6:3~10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사역자로서 자신을 증거하고자 다양한 방법들을 나열한다. 5절에서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라는 두 가지 방법이 나온다. 바울은 사역을 온전히 효과적으로 하고자 할 때 이 두 가지 방법을 행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서 사도 바울은 다시 이 주제로 돌아간다.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여 자기와 경쟁하는 거짓 사도들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후 11:23)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임을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행동 양식을 길게 나열한다. 2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고후 11:27)

 

여기서 바울은 자지 못함을 먹지 못함과 연관시킨다. “여러 번 굶고라는 복수형 표현은, 바울이 금식을 자주 실천했음을 나타낸다. ‘주림과 목마름은 음식도 마실 물도 수중에 없는 때를 언급하는 것이고, ‘굶고는 음식이 있었지만 바울이 영적인 이유로 일부러 먹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신약 시대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금식을 개인적 수련의 일환으로 혼자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집단 사역의 일환으로 단체로 실천하기도 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담긴 누가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아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13:1~3)

 

안디옥에 세워진 지역 교회 선지자와 교사로 임명된 다섯 명의 사역자들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 리더들이나 성도들은 이런 사역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을 우선할 때, 성령님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섬기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부어 주신다.

 

안디옥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다섯 명의 지도자들이 함께 금식하고 기도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바나바와 사울(나중에 바울이라고 불림)에게 맡길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성령님께서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13:2)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특별한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

 

그러나 바나바와 사울은 아직 그 과업을 맡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은 자기들 앞에 놓인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 했다. 이것을 목표로 다섯 지도자는 모두 두 번째 금식과 기도를 같이 했다. 두 번째 금식기도가 끝난 다음, 다른 세 명의 지도자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여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떠나보냈다. 함께 모여 하는 금식과 기도를 통해 바나바와 바울은 첫째, 특별한 사명에 대한 계시를, 둘째, 그 사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혜와 능력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기도하고 금식할 때 바나바와 바울은 다른 세 사람과 같이 선지자와 교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러 보냄 받은 후에 그들은 사도로 칭함 받았다.(14:4, 14) 그러므로 바나바와 바울의 사도적 사역은 안디옥 교회의 다섯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금식한 데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함께 모여 하는 금식과 기도의 관행은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의 열매로서 여러 도시에 세워진 새로운 교회에도 전해졌다. 각 교회의 설립은 그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임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4:21~23)

 

사도행전 14:22에서 각 도시의 믿는 사람들 무리는 단지 제자들이라고 언급 된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서, 누가는 그들을 교회라고 칭한다. “제자들에서 교회들로의 변화는 각 모임을 위해 장로로 임명된 지역 지도자들이 세워지는 것으로 이뤄진다. 각 교회마다 장로들을 택하여 임명할 때, “그들은 금식 기도했다.” 그러므로 각 도시의 지역 교회 설립은 함께 모여 한 금식과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도행전 13

14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함께 모여 하는 금식기도가 신약 시대 교회의 성장과 발달에 긴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특별히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지침과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받았다. 우리가 앞서 검토한 사례들에서 특별히 중요한 결정이나 사명은 첫째, 사도들을 임명하고 파견하는 일이었고, 둘째, 장로들을 임명하고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금식은 해방과 승리를 가져 온다

 

구약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함께 모여 하는 금식과 기도가 하나님의 극적이고도 강력한 개입을 부른 경우를 보게 된다. 네 가지 그런 경우를 살펴보자.

 

여호사밧이 싸우지 않고 적을 격퇴하다

첫 번째 사례는 역대하 20:1~30에서 찾을 수 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과 세일 산 지역의 매우 큰 군대가 동쪽으로부터 그의 왕국을 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공격을 대항할 군사력이 없다는 것을 안 여호사밧은 주님께 돌이켜 도우심을 구했다. 그가 가장 먼저 결단한 것이 3절에 나온다.

 

여호사밧이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대하 20:3)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금식기도를 하기로 한 것이다. 13절을 보면 온 유다 백성이 유다 모든 남자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함께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한다. 여호사밧이 처음에 금식을 공포한 후, 사건은 빠른 속도로 전개되어 극적인 클라이맥스까지 이어졌다. 금식 공포에 대한 첫 반응은 4절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대하 20:4)

 

국가적 위기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적군의 침략은 한 지역 공동체 또는 한 성읍에만 국한하지 않고 나라 전체의 존망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다. 유다의 성읍 사이에는 시기심이나 경쟁의식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군의 침략 앞에서 이러한 것들은 제쳐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개인적 차이를 내세우기보다 공동의 기업을 지키도록 소집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다 백성들이 함께 한 마음으로 모이자 여호사밧은 기도를 인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그 언약에서 약속하신 복을 기억하시게 하는 간구를 드린다.

 

14~17절을 보면 여호사밧의 기도는 즉시 초자연적으로 응답 받았다. 성령님께서 회중 가운데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강력한 예언을 선포하셨다. 그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안심시키시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셨으며,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셨다. 야하시엘의 예언을 들은 여호사밧과 온 유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로 화답했다. 그런 후에 여호사밧은 자기 백성들을 전쟁터로 이끌고 나아가면서 찬양대를 조직하여 앞에 세웠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대하 20:18~19)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대하 20:21)

 

그 결과가 22절부터 30절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무기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유다 백성의 적군들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사흘 간 전리품을 거두어들이고, 하나님께 목청 높여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의기양양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이 뿐 아니라 모든 주변 국가들이 유다 백성들의 이 엄청난 초자연적 승리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는 어떤 나라도 여호사밧과 그 백성들에 대적하여 감히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호사밧의 승리로부터 세 가지 실질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세 가지 모두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설득력을 갖는다.

 

첫째로, 오늘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세력은 여호사밧 시대 유다를 위협했던 군대 못지않게 적대적이고 강력하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이 세력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내부적인 교파 차이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감리 교인들을 공격하는 대신 침례 교인들을 살려주거나, 오순절 교인들을 공격하는 대신 장로 교인들을 살려주거나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종파나 교단 문제를 강조하면서 과거처럼 분열할 때가 아니다. 대신에 지금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 백성의 본을 따라 금식과 기도로 연합할 때이다.

 

둘째로, 여호사밧의 승리는 영적 은사의 필요성을 입증한다. 유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통해 위기상황에 몰린 유다 백성에게 격려와 지침 둘 다 주셨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그때만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로부터 회수할 계획이었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다. 고린도전서 1:7~8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전 1:7~8)

 

사도 바울은 영적 은사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또한 세상 끝날이 이르도록 교회 안에서 역사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며 그것을 현재 우리 시대에 적용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2:17~18)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이 예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바울의 말이 진실함을 뒷받침해 준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교회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말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호사밧의 이야기로부터 배울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영적인 능력이 육적인 능력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0:4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후 10:4)

 

우리에게는 두 가지 무기가 있는데 하나는 영적인 무기이고, 다른 하나는 육적인 무기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여호사밧의 적들은 육적인 무기에 의존했고,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은 영적인 무기만을 사용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영적인 무기가 육적인 무기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함을 증명하고 있다.

 

여호사밧이 그러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어떤 영적인 무기를 사용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연합금식. 둘째, 합심기도. 셋째,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 넷째, 함께 모여 하는 찬양과 경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무기들을 성경적으로 사용한다면, 여호사밧 시대 유다 백성들이 거둔 승리처럼 강력하고도 극적인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호위하시다

함께 모여 하는 금식기도의 두 번째 예를 에스라에서 찾아보자.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8:21~23)

 

에스라는 여러분과 내가 때때로 경험하는 일을 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자기 자신이 했던 고백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에스라는 왕에게 이렇게 고백했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라에게 사로잡혀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인한 부족들과 산적들이 출몰하는 지역을 통과해야하는 긴 여행길에 올라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내와 아이들뿐만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성전 기물들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강도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냥감인가!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바빌론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여정 가운데 그들이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을까? 에스라는 왕에게 보병대와 마병대의 호위를 요청해야 하나? 왕이 그 청을 들어주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에스라는 그런 요청을 하기가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에스라는 이미 왕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살아계시고 진정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지켜주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에스라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보병대와 마병대의 보호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의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왕이 제공하는 경호를 받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쁠 것은 없지만, 그것은 육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모여 하는 금식기도로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의 영역으로부터 오는 도움과 보호만 구하기로 결단했다. 에스라는 여호사밧과 같은 절차를 거쳤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서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했다.”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한 이유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8:21) 하기 위해서다. 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겸비케 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존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수단이다. 유대인은 금식을 이렇게 인식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확인했다. 에스라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의 금식과 기도의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8:23)

 

에스라와 그의 일행의 연합 금식기도는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의 금식기도처럼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하는 결과를 낳았다. 포로로 사로잡혀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완벽한 평화와 안전 속에서 길고 위험한 여행을 마쳤다. 어떤 적이나 강포한 족속들의 공격을 받지도 않았고, 인명이나 재산의 손실도 없었다. 그리하여 여호사밧의 교훈은 에스라에 의해 더 확증 되었다. 그 교훈이란 영적인 영역에서의 승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적 승리는 영적 무기를 사용하여 획득해야 하고, 영적 승리를 거두고 나면 그 결과가 모든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에서 나타나게 된다.

 

에스더가 재앙을 승리로 바꾸다

세 번째 합동 금식기도의 사례는 에스더 4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에스더 4장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틀어 유대인들은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것은 아돌프 히틀러 치하에서 겪었던 일보다도 더 큰 위기다. 히틀러는 전체 유대인들 중 삼분의 일만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페르시아 황제는 유다 민족 전체를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특정한 날에 모든 유대인을 전멸하라는 조서가 반포되었다.

그때 사탄의 앞잡이로 유대인을 멸하려고 음모를 꾸민 자의 이름은 하만이었다.

 

이 이야기로부터 유대인들이 부림(Purim) 이라고 부르는 절기가 생겨났다. 부림은 제비뽑기란 뜻이다. 하만이 유대인을 멸할 날짜를 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기 때문에 부림절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 주사위를 던져 제비를 뽑는 행위는 점술의 한 형태이므로, 하만은 주술적 힘에 의지해서 유대인들을 진멸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만은 유대인을 진멸하는 일에 자기를 이끌어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력에 의존했다. 이것이 모든 갈등을 영적 차원의 싸움으로 만들었다. 그 투쟁은 단지 육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영과 영의 대결이었다. 하만을 통하여 사탄은 사실상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고 있었다. 만약 하만이 유대인 말살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치욕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을 멸하라는 조서가 공포되자 에스더와 시녀들은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것이 영적 차원의 전쟁임을 이해하고 같은 차원에서 반응했다. 에스더와 시녀들은 사흘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금식하기로 한 것이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전갈을 보내 수도인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한 곳에 모아서 사흘간 자기들과 함께 금식하게 했다. (에스더 4:16에서 환난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여호사밧의 시대처럼 다 모았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수산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에스더와 그 시녀와 함께 3일 동안(72시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들의 함께 한 곳에 모여 했던 금식기도의 결과는 에스더서 후반에 기록되어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정책이 유대인에게 유리하게 완전히 바뀌었다. 하만과 그 아들들은 나무에 달리어 죽었고, 페르시아 제국의 전역에서 유대인의 대적들은 완전히 진멸되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페르시아 정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 되었다. 모든 지역의 유대인들이 호의와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금식기도 했기 때문이다.

 

재앙을 피한 니느웨, 멸망한 사마리아

연합 금식기도의 첫 세 가지 사례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찾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례는 이방 나라에서 찾기로 하자. 요나서는 하나님이 고대 세계에서 당시에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다룬 기록이다. 성경은 니느웨를 잔인하고 난폭하며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도시로 그리고 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라고 말씀하신다. 요나는 처음에 가기를 거부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앗시리아제국이 그 당시 자기 나라의 적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면 이스라엘에 대한 앗시리아의 위협이 약화될 것이었고, 반대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의 위험을 가중시킬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나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돌이킬지도 모르는 메시지를 전하러 니느웨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고 나서 요나는 하나님의 두 번째 부르심에

순종해 니느웨로 갔다. 요나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3:4)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자마자 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그 다음 다섯 절에 걸쳐 묘사되어 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3:5~9)

 

구약의 역사에서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빠짐없이 그렇게 깊은 회개를 한 다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일상생활이 정지되었다. 왕과 대신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스스로 본을 보였다. 니느웨에 거주하는 백성들만 금식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소떼와 양떼까지 먹이를 입에 대지 않았다. 성읍 전체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매달린 것이다. 말로는 더 이상 생생한 묘사를 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민족적인 금식은 내면의 깊은 애통함과 자기 겸비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하고도 최적의 표현이었다. 니느웨의 금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요나서 3장 마지막 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니라 (3:10)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에 재앙을 면한 니느웨는 그 뒤 약 150년 간 안정과 번영을 지속하다가, 이후 선지자 나훔과 스바냐가 예언한 대로 기원전 612년에 멸망하였다.

 

오늘에 적용되는 원칙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서 행하신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원칙 한 가지를 가르쳐 준다. 이 원칙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더욱 명백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8:7~10)

 

하나님이 민족들 가운데 역사하실 때, 축복의 약속과 심판의 경고는 똑같이 조건적이다. 심판하시기 일보직전에라도 회개하며 돌이킬 때 그 심판은 철회될 것이다. 반대로 축복도 불순종한다면 상실될 것이다.

 

앗시리아의 운명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운명을 대조해보면 하나님의 열방을 다스리시는 원칙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기원전 8세기에 이방 족속의 성읍 니느웨는 요나라는 선지자 한 사람으로부터 심판의 경고를 단 한 번 들었지만, 성읍의 모든 사람이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같은 시기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하나님의 반복되는 경고를 요나뿐만 아니라 최소 네 명의 선지자 곧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로부터 들었지만 그들은 이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니느웨가 수도였던 앗시리아 제국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었다.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 왕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함락시켜 파괴하고 그 백성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다. 북이스라엘의 비극적 종말은 친숙함은 경멸을 낳는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께 특별한 계시를 받아온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도 그것을 무시했. 그러나 이전에 한 번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없는 니느웨는 한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역사의 이 교훈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온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특별한 경고를 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친숙함으로 말미암아 그 시급함을 인정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당신의 선지자와 성령을 통해 도시와 국가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회개와 금식과 자기 겸비를 요구하고 계신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니느웨처럼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나,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와 금식중에서


[이 글은 월간 JESUS ARMY 2018년 1월호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  
  •  
  •  
  •  
  •  
  •  
  •  
  •  
  •  
  •  
  •    
  •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