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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 중 부산에서 있었던 회개 집회

뉴스윈코리아 기자2018.01.03 23:31:28

    이 상 규 교수

고신대학교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실재였던 6.25 동란 중 피난지 부산에서 회개와 회개운동, 혹은 회개집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 때의 모임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누구의 주도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그 때의 정황에 대해 여러 기록과 증언을 종합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6.25 사변

 

1950625일 가랑비가 내리던 새벽 440분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업은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 집단은 북한군 7개 보병 사단, 1개 기갑사단, 특수 독립연대 등 총병력 111천여 명과 소련제 T-34 탱크 등을 앞세워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했다. 전방초소는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어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휴가, 외출, 외박을 나가 경계가 해이한 상태였고, 그날 새벽은 평화로웠다.

    

 

  

남침한 북한군은 침략 당일 11시 포천을, 26일 오후 1시에는 의정부를 점령했다. 개전 3일 만인 281130분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30일까지 3일 동안 서울에 체류했다. 이들이 계속해서 남하하였다면 75일에서 10일 사이에 부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문 것은 남한에서 폭동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폭동이나 후방 교란이 없자 김일성은 진격을 명했고 74일에는 안양을, 6일에는 안성 평택을, 20일에는 대전을, 25일에는 김천 영동을 점령했다. 831일에는 온양, 예산, 장항, 군산, 광주, 목포, 순천을 점령하고, 일부 남원 구례 하동을 거쳐 진주로 진격했다.

 

2. 회개 및 구국기도회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행렬이 이어졌고 부산은 피난민의 도시로 변해갔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하게 되자 831일에는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남한 면적의 10%를 제외하고는 북한군이 점령해 국가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된 날이 818일이었다. 전쟁발발 당시 부산의 인구는 50만 정도였으나 인구는 급증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목회자들도 부산으로 몰려왔다. 부산은 의의 피난처였다. 부산의 교회들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고, 교회 마당마다 피난민들의 천막이 세워지고 임시 거주지로 변했다. 예배당, 교육관, 사택들도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교회만이 아니라 부산시 광복동 17번지에 위치하고 있던 고려신학교 교사도 피난민수용소로 변해 있었다.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는 한상동 목사와 친분 있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해방 후 교회 쇄신운동을 지지하던 이들이 주로 회집했고, 부산중앙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그 외의 장로교회 목회자들, 그리고 감리교, 성결교 목회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서 회개와 자성이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기도회 혹은 구국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때가 서울이 함락된 후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부산과 그 인근지역만이 적의 수중에 놓이지 않았던 위난한 때였다.

 

이 당시의 기도회를 회개기도회’ ‘회개운동혹은 구국기도회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피난해 온 성도들, 그리고 피난교역자들이 포함된 회개집회 및 기도회였고, 다른 한 가지는 이름 그대로 전란에서 나라를 구해 달라는 구국기도회였다. 전자의 경우 중심지역이 초량교회였고, 후자의 중심교회가 부산중앙교회였다. 물론 이 두 기도운동을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전시 하에서의 기도회가 국난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한 기도가 제외될 수 없었고, 구국기도회에서 또한 회개와 자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중심지였다. 당시 경남지사는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였는데, 그는 250여 명의 교역자들에게 초량교회에서 거처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초량교회에서 기도집회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초량교회 담임이었던 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목사 등은 초량교회에서 전국피난민교역자들을 위한 집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주 강사는 피난해 온 박형룡, 김치선과 박윤선, 한상동 목사 등이었지만 오종덕, 이학인 목사 등도 설교자로 동참했다. 그러나 중심인물은 박윤선이었다. 이곳에서의 집회가 개최된 때는 19508월말이었다. 집회시간은 일주일로 하되 새벽기도, 낮 성경공부, 저녁 집회로 진행되었다. 고려신학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던 이들은 자기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한 의도로 생각하고 참석을 원치 않는 이들도 있었으나 점차 많은 이들도 이 집회에 참석했다.² 이 집회의 모든 경비는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가 부담했다.³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켜야 복을 받아 강성하여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면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한상동 목사는 이 설교를 통해 신사참배의 죄, 해방 후의 교권다툼, 한국교회가 범한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설교했다. 이때 설교했던 박형룡의 설교 11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이미 7월에 초량교회 낮 예배 설교자로 초청받은 바 있는데, 회개 집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설교 또한 회개를 요청하고 있었다. 회개만이 살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6.25동란은 우리 민족의 교회가 범한 죄에 대한 진노의 칼이라고 믿고 있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얻어 우상을 철폐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성전에서 예배하던 우리 성도들이 일본의 강제적인 명령이었기는 하지만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악이었습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회복된 때에도 이 대 범죄에 대한 반성과 통회의 태도가 희미했기 때문에 사분오열 분파되어 교회의 혼란이 심하여지니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당시 설교자들의 공통적인 인식이 신사참배의 죄와 해방 후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인식이었다. 비록 손양원은 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928일 순교자의 길을 가게 되지만, 그가 체포되었던 913일 수요일, 설교하려고 작성해 두었으나 설교하지 못했던 원고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에서도 동일한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상되어 있었다.

 

이 집회에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고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때의 집회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였고, 사흘째 되던 날 새벽에는 참석한 교역자들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가장 큰 회개는 신사참배의 죄였다. 박윤선은 이때의 집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날 새벽기도회 담당이었던 나는 설교 도중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대해, 즉 그가 총회석상에서, 만주에서, 옥중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 시간에 나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직접 들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였다.”

 

그리고는 한부선에게 들은 그의 신사참배 거부, 장로교 제27차 총회 시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항의, 만주에서의 활동 등을 소개했다. 이렇게 했을 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사실을 듣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교역자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회개하는 기도로 이어져서 그 집회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설교하는 나 자신부터 내 죄를 회개하면서 증거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즉 나도 단 한 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이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고백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날 박윤선은 공적으로 회중 앞에서 자신이 신사참배 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이약신 목사도 비록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사에 참배했던 일을 회개했다. 이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기도회를 인도했던 이학인 목사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그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면서 회개하면 산다며 기도회를 인도했다. 여기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고 회중은 소리를 높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이때의 회개집회는 1907년의 대부흥의 때와 유사했다. 온갖 죄악이 고백되었고 회개의 눈물이 회중을 압도하였다. 양떼를 버리고 도망 온 죄, 칠계를 범한 죄, 금전상의 범죄, 우상을 숭배한 죄 등을 고백하였다.

 

원래 집회와 기도회는 1주일 간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집회의 연장을 원했다. 그래서 집회는 1주일 연장되었다. 이때는 부산만이 아니라 울산과 온산 지방 교역자들도 합류한 가운데 계속되었다. 부산중앙교회에서의 기도회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고, 박형룡은 이곳에서도 강사로 활동했다. 초량교회에서의 약 2주간에 걸친 기도회가 끝난 3일 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고 이어서 서울을 수복했다.

    

 

  

3. 인천상륙작전

 

초량교회에서의 기도회와 부산중앙교회에서의 기도회는, 전 국토가 침략자의 수중에 들어가고 부산과 인근 지역만이 남이 있는 절박한 상태인 8월 말 시작되었고 107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도회는 초량교회와 부산중앙교회 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해운대에서도 소규모의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부산 송도에서 한경직 목사는 밥 피얼스(Bob Pierce)목사와 협력하여 4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특별부흥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식적인 혹은 비공식적인 기도회가 진행되었는데, 초량교회에서의 경우 2주간의 회개의 역사 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이 작전의 성공은 전세를 급격하게 반전시켰고, 승기를 잡아 9.28 서울 수복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장병들과 함께 선봉에 서서 방파제를 넘으며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장병은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이다. 로페즈는 선두에서 수류탄을 던져 적의 진지 한 곳을 파괴했다. 그리고 또 다른 수류탄 의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북한군이 쏜 총탄이 그의 가슴과 오른쪽 팔을 관통하고 말았다. 치명상을 입은 로페즈 가 손에서 수류탄을 떨어뜨리는 순간, 안전고리가 툭 튕겨져 나갔다. 선발대 전체가 위험에 처하자, 로페즈는 “수류탄이다!”고 외치고 그 수류탄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았고 결국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는 그렇게 20여명의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고 24살의 나이로 산화했다. (편집자 주)


1950823일 일본 동경에 위치한 미군 극동군 사령부 회의실에서 긴급 비밀회동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계획을 설명하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이 이를 극구 말렸다. 백전노장의 두 지휘관이 볼 때는 인천으로 상륙하는 것은 무모한 시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파이프 담배만 피우던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그의 의지는 단호했다. 사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려면 상륙정 LSD가 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수심이 9미터가 넘는 만조 때만 가능했다. 인천 앞바다의 만조는 915, 1011, 113일 뿐이었다. 그래서 성공률은 5천 분의 1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확신을 가지고 작전을 추진했다.

미군은 915일 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해 “10월 중 반격, 유엔군 준비 진행 중이라는 허위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미공군은 95일부터 13일까지 군산 인근을 맹폭격하고, 912일에는 특수부대 5백여 명을 군산해변에 침투시키기도 했다. 적의 관심을 인천에서 멀게 했다.

이를 감지하지 못했던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방어할 수 있는 수원의 인민군 18사단을 왜관으로 이동시켰다. 결정적인 작전의 실수였다.

이런 덕분에 미군은 915일 새벽 6시 미군 함정 261척과 영국, 호주 등 18, 한국 15, 미해병 1사단과 미 보7사단, 육군해병대와 17연대 등 75천 명의 전투병이 인천으로 진입하게 된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B-29를 비롯한 각종 폭격기의 지원 아래 261척의 함정, 75천명의 유엔군이 총공세로 인천항을 향해 돌진했다.

작전은 성공했고, 이때의 여세를 몰아 928일에는 서울을 수복했고, 계속 북진하여 1019에는 평양을 탈환했다. 상륙작전은 2주간의 회개의 집회 후 얻은 성공이었다.

 

4. 전세의 변화는 회개기도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그리고 이를 통한 전세의 격변은 기도회의 결과인가? 이것은 역사 해석의 문제인데, 작전의 성공이 기도와 회개의 결과로 얻은 승리라고 증명할 방법도 없고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방법도 없다. 단지 믿음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작전의 성공과 전세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기도와 회개의 결과라고 믿었다.

    

 


박윤선은 양자 관계를 연계하여, “우리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은 삼팔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 승전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 도와주신 결과라고 보았다.

 

박형룡의 입장도 동일했다. 그는 작전의 성공과 서울 수복은 회개와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위험 이 고난에서 우리가 구출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고 돌아보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물론 유엔군의 도움과 국군의 공로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을 오게 하고 국군을 일으켜 세운 이가 하나님이시며 그들에게 용기와 기회를 주어 승전하게 한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보답하여야 합니다.”

 

이런 인식은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부산에서의 집회와 기도회 이후, 인근 울산과 온양에서도 집회를 개최했고, 거기서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후에는 제주도 서부교회당에서도 피난민 교역자들을 위한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동일한 역사가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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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영음사, 1992), 101,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5년사(려신학대학원출판부, 1996), 98.

2 박윤선, 102, 허순길, 99.

3 미래한국신문 편집국, 한국역사를 움직인 기도(서울: 언약, 2007), 119.

4 박형룡,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18, 171,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356.

5 박윤선, 102.

6 박윤선, 106

7 박형룡은 초량교회 부산 중앙교회에서 설교했고, 108일에는 부산진교회에서 설교했다.

8 박윤선, 107, “우리가 서 있는 역사적 입장,” <파수군>55(1956. 9), 15.

9 박형룡,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18, 242.


[이 글은 월간 JESUS ARMY 2018년 1월호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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