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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 6.25전쟁 70주년 특별기고

9월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이선호 회장 | 한국안보평론가협회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침공하기 118년 전 프로이센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 다시 말해서 복수의 번쩍거리는 칼을 빼어 든 순간은 수비자에게 최고의 순간이다”라고 역설하였다. 1950년 9월 결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를 통해 볼 때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뿐만 아니라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혜안과 담대한 용기는 물론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 지략과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걸작품이었고, 20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해상전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불퇴전의 승리였다. 적의 측방을 해상으로부터 강타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다른 공격 방법은 없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많은 유질동형의 작전을 경험한 바 있으나, 단지 하나의 기계적인 작전으로 치부하였고 수륙양용 작전의 진가와 그 작전능력 보유의 효용성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1949년 가을 미합참의장이던 브레드리 장군은 일단의 해군 고위급 장교들에게 훈시를 한 다음,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가까운 장래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할 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못되어 미해병 제1사단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1949년 가을 당시 미국의 방위태세는 웨드마이어 장군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이란 축구시합에서 이기고는 경기장을 떠나면서 축배를 들고” 있는 모습과 같았다. 군축과 더불어 육·해·공군 간 생존을 위한 전략적 논쟁과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원자탄이 재래형 폭탄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공군의 전략적 중요성이 급부상 하면서 장차 전쟁은 항공작전 일변도로 바뀔 것이란 주장에 무게가 실렸다. 그동안 미국 군사력의 방패와 창의 역할을 해 온 해상전력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존슨 국방장관은 미해군전쟁대학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해군과 해병대를 크게 실망시켰다. “이제 해군의 전성기는 끝나간다. 더 이상 해군과 해병대를 보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합참의장이 본인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상륙작전은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결코 더 이상 상륙작전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은 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공군이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해병대의 약화와 한국전선의 위기 태평양전쟁의 주역이었던 미해병대가 격감되면서 수륙양용 작전이 해군에서조차 서자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해군 장교들은 상륙작전 관련 보직을 회피하게 되었다. 진급이 누락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한때 38명의 제독과 335명의 대령으로 구성되었던 해군참모총장의 상륙작전 보좌진이 축소되어 대령이 그 책임자가 된 상황이었다. 1945년 미해군은 610척의 상륙함정을 가졌으나 4년 후엔 91척으로 줄었고, 1948년 510척의 상륙주정을 폐품처리 하면서 단 1척을 신규 건조하였을 뿐이다. 한편 미해병대도 포레스텔 국방장관 시절에 병력이 35만 여명이나 되었지만, 1949년 존슨 국방장관 시기에는 23만명으로 줄었다. 놀라운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 미해병대를 전면 개편하여 함대해병대(FMF)를 6개 보병대대와 1개 비행대대로 축소시킴과 동시에, 미해군 항공전력 역시 전쟁 후 첫 신형 항모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국방장관이 취소시킴으로 해상기지를 잃게 되었다. 미해병대는 6개 대대로 명맥만 유지하느냐, 아니면 육군으로 전군하느냐의 기로에 처해졌다. 이러한 미국 내 상황과는 달리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극동군사령부는 미국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독일처럼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체제의 두 정부로 나누어졌고, 1948년 이후 한반도 역시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만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49년 초 주한미군마저 소수의 고문단만 남한에 남겨둔 채 전원 철수해버렸다. 이때 맥아더사령부가 위치한 일본에는 상당 규모의 주일미군이 주둔해 있었다.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절하에 대해 당시 브레드리 미합참의장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미국의 군사안보 관점에서 볼 때, 한국에 군사력을 유지하고 군사기지를 존속시킬 만한 하등의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본다. 한국에 군사원조를 계속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 에치슨 미국무장관이 미국의 아시아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되었음을 공식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한국군은 사실상 중화기나 기동장비가 전혀 없는 경무장한 몇 개의 보병사단 밖에는 가질 수가 없었다. 미국이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부정하여 현대 무기나 장비 획득을 억제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북한군은 소련의 장비지원과 중공의 병력지원으로 잘 무장된 막강한 인민군 14개 사단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투기와 함정이 갖추어져 남침작전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소련과 중공의 배후 지원 및 조종아래 남침을 개시하였다. 당시의 사태를 맥아더 사령관은 “아프리카의 독사 코브라에게 갑자기 물린 것 같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못 당하여 한국군과 급거 투입된 미육군과 미해병대 그리고 영국해병대는 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을 둘러싼 조그만한 영토를 제외하고는 남한의 전국토가 적에게 점령당한 처절한 상황이 1950년 8월 중반이었다. 이때 북한군은 총전력으로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집요한 공세를 폈다. 백척간두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미해군 제7함대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어도 적의 육상병참선은 서울을 통하여 남쪽으로 중단 없이 전진하였고, 코브라 주둥이 같은 적 전선부대들의 돌파 추진력은 날카롭고도 강력하였다. 그러나 적의 측방과 후방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이보다 앞서 7월 4일 맥아더는 트루만 대통령의 참전 결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우선 1개 대대의 전투부대를 급조하여 한국전선에 최초의 지상군 전투부대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산 부근에서 북한군에게 박살나서 일시에 전투력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으니, 이 부대가 스미스 특수기동부대였다. 바로 이날 동경 맥아더의 사무실에서는 북한군의 지상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한 해상공격작전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던 육군 제1기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적의 병참선을 차단함으로 그가 늘 말했듯이 북한군을 망치로 때려 부수는 작전(Hammer and Slash)의 복안을 발표하였다. 물론 이때 인천 외에 진남포, 주문진, 군산 등도 상륙지점으로 고려되었다. 그는 이 작전을 위한 상륙군을 포함한 요구사항들을 워싱턴 당국에 타전하였다. 이때 맥아더 휘하에는 소규모의 상륙작전 부대와 가용 자원밖에 배속된 것이 없었다. 미육군 고급 지휘관들 중에서 유일하게 상륙작전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던 그는 미해군 태평양함대로부터 AGC, APA, AKA, LST 등 상륙함 각 1척씩을 배속 받아 소규모의 상륙 훈련단을 만들고, 코로나도에 있는 태평양 상륙군훈련단과 전술항공통제전단 그리고 제 1수륙양용단의 참모들로부터 57명의 해군·해병 기간요원을 차출하여 충당하였다. 제1수륙양용단 사령관인 도일 제독은 태평양 전쟁시에 동태평양에서 지휘관과 참모를 역임한 상륙작전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깊은 전문성을 가진 몇 안 되는 해군장성 중의 한사람이었다. 도일 제독은 당시 동경만에서 상륙작전 연습을 실시하고 있던 중 맥아더의 요청에 의해 제 7함대의 수륙양용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됨으로 맥아더의 핵심 예하부 대장이 되었다. 도일 제독을 중심으로 한 해군·해병의 핵심요원들은 그들이 가진 경험과 전문지식으로 맥아더가 시급히 필요로 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어야 했다. 이리하여 불확실한 계획지침을 갖고서 7월부터 상륙작전계획이 착수된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 계획의 진전 과정 맥아더 주위에서는 인천 외에 군산을 상륙지점 대안으로 꾸준히 권고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맥아더는 왜 인천을 고집하였는가? 인천은 한국의 역사적인 도읍지이며 최대의 도시인 서울에 이르는 항구로서, 서울은 가장 중요한 교통중심지로 철도망과 도로가 서울을 중심으로 남북한을 연결하고 있고, 국가 전신·전화망도 서울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 최대의 공항이 인천과 서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략적 이점이 있다 할지라도 상륙작전을 위한 전술적 조건은 이와 정반대였다. 몇 가지 수로조건을 보면 간만의 차이가 32 피트나 되고 접근수로의 조류속도가 7 내지 8 노트로 상륙주정(LCVP) 의 속력을 능가할 정도이다. 협수로는 함정과 주정의 선회나 기동을 위한 공간이 불충분하여 막다른 골목길이나 다름없었다. 자칫 파손되거나 좌초되는 함정과 주정들이 통로를 가로막게 될 것인 바, 적의 해안포나 지상포화의 표적이 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상륙군이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이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내륙 진출에 장애가 되는 밀집된 건조물이 해안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륙함정과 상륙주정이 접안할 수 있는 경사도의 수심인데, LST는 29피트, LCVP는 23피트가 필요한데 이러한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경우는 월 3회나 4회에 불과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인천이 상륙돌격을 하기에는 최악의 장소라고 하면서도, 맥아더의 뜻을 헤아려 “상륙 가능성으로 볼 때 최악의 해안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최선의 해안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의 옛 격언에 ‘현명한 장수는 불리한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꿔 놓을 수 있는 자’란 말이 있지 않으냐”고 말하였다. 앞서 언급한 여러 물리적인 장애 외에 다른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이는 맥아더 장군이나 도일 제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첫 번째는 이러한 대역사를 감당할 만한 유능한 상륙군과 상륙기동함대를 획득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상륙작전의 후속 위협으로 중공의 한반도 개입이나 소련의 동구 침입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반격에 대한 대응책이 었다. 유능한 수륙양용군은 역시 미해병대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며, 미국 시민들은 물론 백악관이나 국방성에서도 해병대의 승전보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해병대는 축구시합을 끝낸 경기장처럼 팀을 해체한 상황이었던 바 정예상륙사단을 재건하기는 쉽지 않았다. 맥아더는 미육군 제1기갑사단을 사용하려던 계획이 취소됨에 따라 고육지책으로 낙동강방어선 서측방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던 미해병 제1 여단을 뽑아 상륙군의 주력인 미해병 제1사단의 기간연대를 만드는 새로운 구상을 하였다. 해병사단 신편을 위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약 7천 명의 예비역을 동원 보충하기로 하였고, 기타 필요한 요소부대를 창설하기 위하여 대서양 함대해병대의 대부분 요원을 태평양으로 전환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어려운 일들을 단시간 내에 완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케이트 해병대사령관과 셰퍼드 태평양함대 해병대사령관이었다. 그들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노력과 함께 하원 군사위원회의 입법 및 예산 승인이 맥아더의 아이디어를 실천하도록 만들었다. 7월 19일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신편된 미해병 제1사단이 드디어 8월 12 일 샌디에이고를 출항하였다. 지중해 제6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1개 대대는 수에즈운하에서 출발하여 해상 합류하도록 되어 있고, 준비가 덜 된 제5연대는 인천에 후속 상륙하도록 하되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었던 제7연대는 인천외항에서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도 부족하여 상륙 당일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낙동강전선에서 상륙돌격부대로 차출되어 미해병 제1여단과 함께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인천 상륙작전만큼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 작전이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약화되어 있었고, 육군과 해군이 상륙작전은 한물갔다고 공공연히 비난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을 위한 해상병참선이 길게 태평양상에 늘어짐으로 소련군이 라인강을 건너오거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는 구실을 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맥아더는 극동에 배치된 군사력만으로 싸우라는 충고까지 나왔다. 7월까지만 해도 맥아더가 합참에 5회에 걸쳐 작전계획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내지 못했다. 맥아더의 집요한 압력에 못 이겨 가용부대에 대한 요청을 승인해 주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8월 23일 셔만 해군참모 총장과 코린스 육군참모총장 등 막료들을 동경으로 급파하여 맥아더와 담판을 짓도록 하였다. 합참의장이 보낸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맥아더는 도일 제독으로 하여금 간명한 브리핑을 먼저하게 한 다음, 내방자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고 나서 조용히 일어서서 약 한 시간 동안 자기의 전략을 즉흥적 해설로서 설득시켰다. 그는 결론을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맺었다. “상륙작전은 가장 강력한 전쟁수단이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5천 대 1의 도박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도박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박살낼 것이다.”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아무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합참 대표단은 만족하여 돌아가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워싱턴에 돌아간 다음에 맥아더의 제안이 가까스로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날 맥아더는 셔만 제독과 코린스 장군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이날 미해병 제1사단의 전방지휘소 요원인 상륙군사령관 스미스 해병소장이 항공편으로 동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면서 자제력이 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스미스 소장은 육군보병학교 출신으로 2차대전시에 오키나와와 뉴브리튼의 상륙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직전까지 해병대사령관 보좌관으로 근무했었다. 실제로 8월 12일 미극동군 사령관(CINCFE) 작전계획 100-B로 일명 크로마이트 (CHROMITE) 상륙작전계획이 이미 발표되어 있었는데, 상륙일은 9월 15일이고 상륙 장소는 인천이었다. 이때가 상륙군사령관이 동경에 도착하기 23일 전으로, 정상적인 상륙작전 계획수립 기간이 최소 90일이란 것을 전제할 때 너무도 급박한 일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작전계획이 하달될 당시엔 워싱턴 당국의 최종 승인조차 얻지 못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 계획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용 정보의 불충분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다음 인천의 수로 조건은 미육군에서 여러 번 조사된 바 있으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 자료인 조석표조차 제각각이었다. 도일 제독은 미해병대의 사진정찰기 F4U 2대를 함재기에서 띄워 일일 13회의 출격임무를 부여하여 4일간에 걸쳐 인천항 일대의 항공사진을 촬영 분석함으로 D일의 정확한 만조와 간조 시간을 확인하였다. 당일의 아침 만조시각은 일출 후 45분, 다음 만조시각은 일몰 후 27분이었다. 만조 시간은 2시간이므로 이 동안에 APA와 AKA가 외항의 수송선 정박구역으로부터 협수로를 통하여 진입, 접안 및 이안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며, 일출 전과 일몰 후의 낮은 가시거리 조건하에서 항행이 매우 위험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대에 상륙군을 지정된 해안까지 이동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오후 상륙하는 부대에게는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시간이 결정적으로 부족할 것이 뻔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인천항을 감제하는 월미도의 사전 제압 또는 점령이었다. 결국 1개 대대가 조조에 월미도에 먼저 상륙하고, 오후 만조 시 해병 제1사단의 주력이 인천에 상륙하도록 하는 2단계 상륙 돌격계획이 확정되었다. 인천 상륙 돌격의 감행 상륙작전 계획이 확정되는 순간에도, 미해병 제1사단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전력인 제5연대는 상륙작전이 아닌 지상작전에 투입되어 육군의 지휘를 받으면서 한국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의 서측방을 사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맥아더 극동군사령관 예하의 제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책임을 진 입장에서 해병 제1여단의 인천상륙작전 전용을 완강히 반대하면서 최후 저지선이 돌파당해도 책임질 수 없다는 배수의 진을 치기도 하였다. 미해병 제1사단이 갑자기 동원 편성되었기 때문에 통영상륙작전으로 명성을 떨친 한국해병 제1연대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맥아더는 미육군 제10군단을 상륙군으로 하여 그 밑에 미해병 제1사단과 미육군 제7사단을 두되 D일의 상륙돌격부대는 미해병 사단과 배속된 한국해병 연대가 담당하도록 하고, 미육군 제7사단과 배속된 한국육군 제17연대 는 D일 이후의 후속 상륙부대로 지정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미해병 제5연대가 영산전투에서 빠져나온 것이 9월 4일이었다. 피로도 회복하지 못하고 부산에서 재편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탑재하기 시작하였다. 상륙을 불과 10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때 낙동강 전선은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9월 5일 영천이 뚫림으로 대구가 위태롭게 되고 부산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미제8군 본부의 하와이 이동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상륙군으로서는 상륙목표 지역인 인천, 서울 일대에 얼마나 강력한 적이 포진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한다면 한국의 운명은 끝장나는가 하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다. 상륙이 성공하더라도 소련 잠수함이나 항공기가 개입하여 상륙군의 후속부대 진입을 봉쇄하거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건너온다면, 비록 맥아더가 항공폭격으로 압록강을 피바다로 변하게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미국이 3차대전을 무릅쓰고 대항할 것인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에 포함된 상륙 기동부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 인천항 탈취 및 해안 교두보선 확보 * 신속 전진 및 김포 비행장 점령 * 수도 서울 점령 * 서울의 북, 북동 그리고 동쪽 차단진지 점령 * 인천·서울을 점령한 군사력이 모루(anvil)가 되고 북상하는 제8군이 망치가 되어 공산군을 타격 맥아더는 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제7합동기동부대(JTF-7)를 편성했는데 상륙작전교리에 따라 제7함대 사령관인 스터러블 제독이 본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해군과 상륙군을 총지휘하는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이 되고, 상륙군으로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을 제10군단으로 편성했는데 알몬드 장군이 군단장을 맡았다. 합동기동부대의 편성은 인상적이었다. 71,339명의 한미 육해군 및 해병대 장병과 7개국 해군함정 230척 뿐만 아니라, 34척 일본 LST까지 참여하였다. D일전 작전으로서 진남포와 군산 그리고 주문진에 대해 함포사격에 이은 양동 및 양공 작전이 실시되었고, 2일간에 걸쳐 치열한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이 인천항에 집중되었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미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배속된 한국해병 1개 중대와 함께 상륙주정에 전재한 다음 5시 40분에 월미도로 향발했다. 기동함대 기함에서는 맥아더와 주요 지휘관 및 참모들이 쌍안경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월미도 일대는 포연에 싸여 잘 볼 수 없었다. 제1파가 ‘녹색해안’에 상륙한 것은 6시 31분이었고 뒤이어 6시 59분에 대대 예비대까지 상륙이 끝났다. 월미도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 제226독립연대 예하의 1개 중대와 918연대 예하의 1개 포대로서 총 병력은 400명 정도였다.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고 포로 136명, 적 시체 180구를 확인하는 전과를 단번에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부상 17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대장의 상황보고가 기함인 메킨리호에 있는 맥아더에게 전달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격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군과 해병은 오늘 아침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 적이 없었다.” 제1단계 상륙은 성공하였으나, 오후 만조시간에 주력부대의 본격적인 상륙인 제2단계 상륙이 남아있었다. 인천 북방 고지대를 끼고 있는 암벽지대인 ‘적색해안’에는 제5연대가, 남쪽의 부두를 끼고 있는 ‘청색해안’에는 제1연대가 상륙하며, 예비대인 한국해병 제1연대가 역시 ‘청색해안’에 상륙하도록 함안 이동계획이 짜여 있었다. D일 오후 5시 31분에 예정대로 적색해안에 도착한 제5연대는 사전에 준비해 간 알미늄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상륙에 성공하였고, 청색해안은 평탄한 해안조건이어서 제1연대가 수륙양용차를 타고 해안 깊숙이 진출할 수 있었다. 뒤이어 예비대가 상륙하여 해안을 정리하자 30분 후에 LST가 접안하여 보급품을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우려했던 타라와 상륙작전은 재현되지 않았다. 미해병 제2사단이 태평양 전쟁시 감행했던 타라와섬 상륙작전은 첫날만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상륙이었다. 인천 상륙작전은 초일 전사 21명, 전상 175명에 불과했다. 일몰시각까지의 짧은 시간 내에 적의 반격을 무릅쓰고 3000톤에 달하는 상륙군의 보급품이 양육되고 상륙한 3개연대가 적의 유효사정권 밖으로 진격하여 해안 교두보선을 확보함으로써 야간 진지보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급조된 해병사단이었지만 그 요원들은 모두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상륙작전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이다. 상륙 12일 후에는 치열한 격전 끝에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고, 북한군은 병참선이 차단된 상황 하에서 제10군단과 제8군의 양익 포위공격에 압착 섬멸당하고, 반신불수가 되어 38도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맥아더의 도박은 성공했다. 인천 상륙작전의 교훈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승전이었다. 이는 전략적, 전술적, 정치적, 그리고 심리적인 승리를 연합군과 한·미 두 나라에 안겨 주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해 가정법 표현을 쓰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그 당시를 회상해 볼 때 만약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되지 않았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은 고수될 수 없었을 것이며, 한국정부는 제주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태가 호전되어 지상군이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비록 인천 상륙작전에 이은 원산 상륙작전이 해상기뢰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미해병대가 실지 회복 직전에 중공군의 대량 개입으로 사상 최악의 고통과 좌절을 맛보면서도 성공적인 함흥철수작전으로 우리의 수많은 인명을 구출해낸 것 역시 상륙작전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1세기 탈냉전시대에 즈음하여 한반도의 전쟁억제와 평화정착을 내다 볼 때, 북한의 대남전략이 변화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장차전(=미래전)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개연성과 가능성이 큰 전투작전은 역시 상륙작전일 것이다. 성공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현행 한미연합 군 작전계획5027에 한·미연합 상륙작전이 명시되어 있다. 상륙작전 의지 와 능력은 국가 생존전략 차원에서 보존 유지되어야 한다. 방대한 규모와 특이한 복잡성을 지닌 상륙작전은 유자격 전문부대가 아니면 수행될 수 없다. 현재 한국해군은 상륙작전 전문가 양성을 사실상 외면하고 있으며, 가용상륙군에 걸맞는 상륙함정과 함안이동수단의 확보에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최악의 작전환경 하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선의 확립된 전술작전교리와 치밀하게 성안되고 시험된 계획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불투명한 최초 지시와 사상 최단 계획수립 기간에도 불구하고 각급 제대가 동시적이고 병행적이며 협조적인 계획을 발전시킨 것은 평시의 전문적인 교육훈련과 실전경험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창의 덕분이었다. 또한 최고지휘관의 결단과 과감한 리더십이 주효한 전략적 전술적 기습달성의 표본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상륙작전은 고도의 입체적 통합작전으로서, 해상세력을 중심한 자원과 노력의 통합으로 목표 성취가 가능한 해상 진공인 바 상륙군의 탄력(Momentium)이 무엇보다 강조된다. 조직구성원의 배수진을 친 물리적 돌파력은 물론 사생결단의 정신력이 그 중핵이 된다. 그래서 해병은 강인해지도록 연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투사전력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구비요건이다. 미해병 제1사단은 그러한 조건을 갖춘 철제부대였다. 한국해병대는 어떤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1950년 9월 24일 상륙군이 서울 외곽에서 치열한 공격을 전개하면서 수도 탈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모스크바 발 AP통신이 소련의 인천상륙작전 평가를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인천 상륙작전같은 경우라면, 원수가 지휘하지 않고 병장이 지휘해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해진 맥아더는 이렇게 응수하였다. “가장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상륙은 적이 저항하지 않는 곳에 상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역시 병장보다는 원수라야 할 것이다.” 이선호 현] 한국안보평론가협회장 미해병지휘참모대학 졸업, 동국대 행정학박사 베트남 참전, 해병대 대령 예편, 국방대 교수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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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일가 신격화와 북한의 3대 세습독재
이용희 교수 | 가천대학교 북한은 국가경제가 심각하게 몰락했음에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체제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와 김일성 주체사상이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은 국민들을 외부사회 정보로부터 차단시킨 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세뇌교육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신격화하였고 이를 근거로 하여 3대 세습 독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본고는 김일성 일가 신격화와 이에 대한 사상적 근거인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해 분석하고, 신격화 교육에 대한 실체와 3대 세습 독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한계 상황을 다루고자 한다. 북한에서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는 정치, 사상, 법, 경제, 역사,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1. 사상적, 헌법적 토대 위에서의 신격화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는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토대인 김일성 주체사상과 맞물려있다. 김일성 주체사상은 북한의 최고 통치 이념으로 다른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 최우위에 있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을 구속하는 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1 또한 북한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교육, 문화, 군
국가인권위원회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살펴본 동성애 차별의 허구성과 차별금지법의 불필요성
박성제 변호사 | 한국기독문화연구소 차별금지법이 가져 올 거대한 쓰나미 2006년경부터 시작된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는 한국교회의 단합된 목소리와 동성애 및 과격 이슬람의 폐해를 인식한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로 7차례 막아왔다. 제20대 국회에서는 우회적인 차별금지법인 혐오표현규제법안(김부겸 의원 발의),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법률안(신용현 의원 발의) 등의 시도가 있었으나 차별금지법의 발의는 없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을 지지층으로 삼은 정의당의 총선 공약에 따라 6. 29. 「차별금지법안」을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하였으며, 이에 발맞추어 30일엔 국가인권위원회가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라고 국회에 의견을 표명하였다. 대다수의 편향된 언론들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야 할 당위성만을 연일 쏟아내며 합리적인 반대의견을 가짜뉴스로 매도하고 있다. 이러한 여론몰이에 따라 만약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과연 한국교회는 차별금지법이라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진리를 선포할 자유와 권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정의당이 「차별금지법안」의 제안 이유로 내세운 이유 중 ‘많은 영역에서 차별이 여전히 발생하고, 적절한 구제수단이 미비’하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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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언론회, 동성애 축제가 코로나 퇴치보다 중요한가?
서울시(시장 박원순)는 지난 달 24일, 6월 12~13일에 예정된 동성애 퀴어 행사를 허락하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 온 나라는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하여 온갖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서울시는 동성애 집단 행사를 허락한 것이다. 광장 사용에 관한 것은 서울시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올해는 서울시인권위원회(위원장 한상희-건국대 법대 교수)의 권고를 서울시가 받아들이는 행태로 이뤄졌다고 한다(지난해 9월 26일 서울시 인권위원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가 없도록 각 시설 담당부서에 지도·감독을 철저히 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 행사가 6월로 예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국민들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정상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코로나바이러스가 완전 소멸되었다고 보려면, 확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가운데, 코로나바이러스 병원균의 잠복기인 14일의 두 배가 넘는 28일 이상의 기간이 경과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달 서울시가 이런 결정을 내릴 때에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그 날 만도 100명이 나오고, 전체 확진자가 9,137명이나 되는 위중한 상황이었다.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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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이선호 회장 | 한국안보평론가협회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침공하기 118년 전 프로이센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 다시 말해서 복수의 번쩍거리는 칼을 빼어 든 순간은 수비자에게 최고의 순간이다”라고 역설하였다. 1950년 9월 결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를 통해 볼 때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뿐만 아니라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혜안과 담대한 용기는 물론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 지략과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걸작품이었고, 20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해상전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불퇴전의 승리였다. 적의 측방을 해상으로부터 강타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다른 공격 방법은 없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많은 유질동형의 작전을 경험한 바 있으나, 단지 하나의 기계적인 작전으로 치부하였고 수륙양용 작전의 진가와 그 작전능력 보유의 효용성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1949년 가을 미합참의장이던 브레드리 장군은 일단의 해군 고위급 장교들에게 훈시를 한 다음,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가까운 장래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할 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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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독재법인 차별금지법의 실체를 국민에게 더욱 알려야”
2020년 2월 10일 오후 1시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차별금지법반대.낙태반대.중독예방.올바른성교육 국회포럼(이하 국회포럼)’이 백만국민대회 2020 위코리아(WE KOREA 2020) 주최로 열렸다. 나혜정대표(다음세대사랑학부모연합) 사회로 진행된 국회포럼의 1부 개회식에서 국회포럼 행사 주관자인 민경욱의원은 “차별금지법은 소수자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났다며 “신앙과 양심의 자유에 따라 동성애 반대하는 다수의 국민을 범죄자로 만들어 처벌하는 악법”이라며 국회포럼을 개최하는 취지를 설명했다. 백만국민대회 대회장인 류정호목사(기성 총회장)는 환영사 가운데 “젊은이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에이즈 감염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그 원인은 “국민들 모르게 만들어진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동성애를 의미하는 ‘성적지향’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잘못된 법이 만들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악영향이 미친다”며 반성경적인 악법 제정에 대해서 심히 우려를 나타내었다. 인사말을 전한 준비위원장 이용희교수(에스더기도운동본부 대표)는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결정된다. 국민들을 깨우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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